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우매한 민초를 비유할 때면‘개와 돼지’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천한 사람과 귀한 사람을 구별할 때는‘개나 소’를 생각의 수면위에 올려 개는 천한 사람을, 소는 귀한 사람을 빗대고 있지만, 가끔 보면 개와 소를 동급으로 싸잡아‘개나 소’를‘아무나’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개는 좋을 런지 모르겠지만 소의 입장에서는 분개할 일이다.
어쩌면 소의 지위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격상되어 있는 듯 하는 것은 소가 바라던 바가 아니라 사람의 필요와 인식에서 비롯된 결과인 것 같다. 농경사회에서의 소는 농사와 이동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고급 일꾼이자 재산이었다.“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에서처럼 도둑의 최상급에 소가 등재될 만큼 소의 재산적 가치는 막대했다. 소는 힘은 세지만 성품은 온순해서 농가의 대표적인 노동 가축이 되었다. 가축 중에는 개도 있고, 돼지와 염소도 있다지만 특히 소를‘생구(生口)’라고 부른 이유는 식구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대우라야 고작 큰 몸집 돌려서기 조차도 버거운 좁은 집 한 채에 그래도 넉넉하리만치 말려서 잘게 썬 짚이나 마른풀인 여물을 퍼지게 먹여주고, 항상 커다랗게 핏대 선 눈을 뜨고 있어도 혼내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던가. 그러다가 아직 힘쓸 만 한데 시름시름 앓고 있으면 여물에 낙지 한 마리 쌈을 해서 대접해 주면 거뜬히 일어나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또한 소의 안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욕심 연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베푸는 자선이었다.
주인은“소처럼 일하고 쥐처럼 먹으라”는 속담을 생구인 소에게만 적용시켜 뼈 빠지게 일을 시키면서도 고작 먹이는 것은 풀떼기 정도이다. 소가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항상 눈가에 물기 머금는 것은 자신도 힘 팽기니 육식 좀 달라는 읍소가 아니었을까. 소는 평생 일만 하다가 죽어서도 식재료와 가죽을 제공하며 생의 흔적을 마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단하게 일하는 소 꿈을 꾸기보다는 먹을 복이 있는 돼지꿈을 꾸길 원하는 심보는 무엇일까?
소를 부리는 사람들은 소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온순하고 우직하다는 관대한 표현으로 대신하려 한다. 아무리 소의 반추위, 벌집위, 겹주름위, 주름위 네게의 위를 가득 채울만한 그럴듯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소에게는‘우이독경 (牛耳讀經)’일 뿐이다. 이러한 표현은 부리는 인간의‘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이 아닐 런지.
길들여지지 않은 들소를 들여다보면 그런 생각이 싹 가실 것이다. 야생 들소를 가까이 할 수 없어 다 표현 못하겠지만 유독 단순한 소 그림이 아닌 소를 의인화하여 자화상처럼 그려낸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작품을 보면 소의 특성과 잠재된 저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다. 그가 그린‘흰 소’,‘황 소’,‘떠받으려는 소’,‘움직이는 소’,‘싸우는 소’,‘울부짖는 소’등의 작품의 제목에서 감지되듯이 일제 강점기 때 어려운 현대사의 질곡과 외로움 그리고 괴로움을 담은 자화상을 주제별로 그려냈다. 그뿐만이 아니라‘소와 어린이’,‘소와 소녀’등의 다양한 모습의 작품을 통해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민족의 평화, 향토애 등 고단한 시대적 정서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소를 그려 냈다. 그의 소 그림 작품 중‘황 소’는“마치 스페인 투우처럼 무섭게 느껴진다”라는 평 앞에 이중섭은“내가 그린 소는 싸움소가 아닌 착하고 고통 받는 한국 고유의 소”라고 반박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아마도 이중섭은 소 그림을 통해 우리 민족의 온후하면서도 강인한 내재된 저력을 담아내고 싶었던 게다.
성경에 등장하는 소는 순종과 희생으로 대변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희생’(犧牲, Sacrifice)은 본래 제사에서 산 제물을 바치는 것 또는 그렇게 바쳐진 산 제물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제물을 뜻하는‘희생’(犧牲)의 두 한자를 분해해 보면 부수가 소 우(牛) 자다. 실제로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법에 보면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의 예물 중에 흠 없는 소와 송아지가 희생 제물로 명기되어 있다. 단순히 값 비싸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레위기 1:2,3)
또 하나의 소가 등장하는 성경의 내용은 엘리 제사장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승패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은 마음에 멀리하면서도 언약궤만 진중에 머물게 되면 승리할 것으로 착각하였다가 안타깝게도 블레셋에게 언약궤마저 빼앗겨버렸다. 멋모르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탈취한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이 멈출 날이 없게 되자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시켜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게 된다.
새 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속건제로 삼을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실은 수레를 암소들로 하여금 끌게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두 암소의 향방을 예의 주시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곧장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것으로 판단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이끄는 두 암소는 하나님의 사신이 되어 어린 송아지의 울음소리에 귀 막고, 처음 짊어진 수레의 덜걱거리는 아픔과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무게감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묵묵히 벧세메스에 안착했다. 이를 영접한 벧세메스 사람들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은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사무엘상 6:13,14절).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 또한 소의 우직한 힘을 가졌으리라. 더욱이 새끼가 딸린 모성애를 지닌 암소였기에 배가 되는 힘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 울음소리는 벧세메스의 사람들의 기쁜 함성보다도 우렁찼을 것이다. 그러나 암소들은 우직한 힘을 불순종에 소진하지 않았고, 동그란 눈망울을 굴리며 점점 멀어지는 새끼들의 동태에 눈이 머물지 않았으며, 새끼들이“음메 음메”하며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목소리에 혹여 사명의 길 어그러질까봐 이를 갈며 끝내 마음을 지켰다.
사람들은 그렇게 강직한 소를 온순하고 우직한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소의 코청을 꿰뚫고 거기에 고리모양의 나무인‘코뚜레’를 끼웠고, 소의 향방을 부리기 위해서 거기에다‘고삐’를 매어“이랴 저랴”하며 좌회전 우회전 신호를 넣는다. 그리고 고개 쳐들어 항변하며 불순종하지 않도록 목에 둥그렇게 구부러진‘멍에’를 올려 억지 순종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배고픔 때문에 곁길로 빠져들지 않도록 가는 새끼로 그물같이 얽어서 소의 주둥이에‘부리망’을 씌우기도 하였다. 그리고서는 사람들은 소의 성품과 행보 위에‘온순함’과‘우직함’이라는 훈장으로 또 다른 멍에를 씌워버렸다. 조선 세종 때 청백리이며 예악에 밝았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았던 문신 맹사성(1360~1438)은 군자의‘유유자적’(悠悠自適)을 배우기 위해 말 대신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 소의 유유자적한 자태는 맹사성의 고결한 인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멍에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벳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에게는 코뚜레도 고삐도 멍에도 부리망도 얹혀 지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언약궤와 속건 제물을 실은 수레를 태어나 처음으로 출산 후 아직도 여물지 아니한 여린 등살에 올려 흐트러짐 없는 사명의 걸음을 떼었던 것이다. 어쩌면 두 암소가 같이 등짐을 지었기 까닭에 언약궤와 속건 제물에게서 무게감을 느낀 것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낯 선 환경과, 미지의 땅을 향한 걸음걸이 그리고 간간이 목 메임으로 골짜기에 산산이 부셔져 들려오는 어린 자식들의 목소리와 그 여운이 마음에 켜켜이 쌓이는 무게감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명의 일선에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께서는 듣지도 보지도 않은 코뚜레와 고삐와 멍에를 스스로 둘려 씌우고 이 사명 때문에 잘못되고 죽는 것처럼, 살점 뜯기고 가죽 벗겨지고 마지막에는 제물로 불태워 지는 것처럼 생각하며 뒷걸음질 치고, 두리번거리며 벧세메스 길에서 어그러진 길을 가려한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내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시다 골고다 언덕을 경유해서 십자가에 오르시면서 다 당하시고 속죄 제물까지 되어 주셨다. 그러니 뭐가 믿어지지 않고, 뭐가 더 부족하고 아쉬우며, 뭐가 두렵단 말인가.
다만 우리 주님은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부터 천국이 이루어지고 본향까지 무난히 당도할 수 있도록 주님이 친히 쓰셨던 멍에를 선물로 주셨다. 그 멍에는 억압과 속박의 멍에가 아니라 하늘가는 길을 쉽고 짐을 가볍게 도움을 주는 하늘나라에서 출시한 특허 상품으로 우리 주님께서 사용 후기를 남기신 제품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9,30).
이제는 내가 만든 것에 꿰이고 묶이고 짓눌리는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나의 신앙과 사역 위에 말씀과 기도의 코뚜레를 꿰고, 성령님의 이끄심의 고삐를 단단히 묶으며,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감사와 사랑과 순종의 부리망을 사역과 신앙의 입구에 착용하자. 그리하여 나일 강 가에서 올라온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에게 먹히지 아니하고 여전히 우리 주님이 배설해 주신 말씀의 푸른 초장과 보혈의 강가에서 생명수를 길어 마시며 여전히 주님의 것으로 살지고 아름다움을 간직한 일곱 암소되어 주님의 것을 소중함으로 지키며 천국 벧세메스로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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