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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견(忠犬)과 똥개(糞犬)
임현희 2020-12-15 추천 10 댓글 0 조회 981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이 그 어느 날보다도 힘 있고 섬세하게 임한 여섯째 날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감격해 마지 않으셨다. 그러나 먼저 지음 받은 남자 아담이 최상의 환경인 에덴동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옆구리 시린 모습이 좋지 않아 보여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며 여자 하와를 만들어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생애 반려자’(伴侶者)가 되게 하셨다.

 

  ‘반려자배우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지만 그 원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돕는 배필이리라. 서로 사랑과 복종으로 결합되어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반려자이다. 진짜 반려자는 부부로 국한되지만 다변화된 사회와 변화무쌍한 시대 조류는 그 결합 상품을 부부로만 선 긋지 아니하고 벗 또는 즐기거나 지녀서 마치 자신의 벗이 된 듯한 사물까지도 폭을 넓혔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5:22-25)

 

   근자에 그 수혜를 가장 폭 넓게 누리고 있는 대상은 개와 고양이이다.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지내는 동물이었던지라 애완동물이라는 용어는 그리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에 자리 잡았지만, 거기서 좀 더 나아가 반려동물이라고 애칭 함에는 다소간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마치 사람이 자리매김 해야 할 반쪽의 환경을 고양이에게, 반쪽의 품을 개에게 빼앗긴 듯한 일말의 서운한 감정이랄까?

 

   서구식 생활 풍속도로만 여겨왔던 반려견은 무서운 속도로 안방과 사람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가게들은 애견 샵이라는 이름으로 지경을 넓혀 나오고 있으며, 대형 마트에 가도 버젓이 애견 용품이 한 코너를 점유하고 있다. 반려견을 품에 안고 삶의 언저리를 채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어느 한 편으로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채우지 못하는 시린 가슴들도 많이 있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미치게 되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련하게 아파온다.

 

   이 땅의 교회가 부흥되고 복음 행진이 순적하게 된 것은 수많은 순교자와 순교적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의 희생적인 삶이 밑거름이 되었다는데 이견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양이와 개 또한 그네들의 선조들의 노고 덕에 오늘의 애완동물 또는 반려동물의 위상을 얻게 되었음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고양이는 밤 새 째진 눈을 부릅뜨고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벌여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밤새도록 천정에서 왕복 달리기를 하며 주인의 곤한 잠을 흩어 놓았던 고얀 쥐를 주인의 마음으로 단호하게 처단해서 토방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고무신 옆에 진설해놓는 공로를 인정받아 주인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골 대문에 커다랗게 문패처럼 쓰여 있던 개조심은 낯선 사람으로 하여금 경계 태세에 들어가게 만드는 문구였지만, 외출하고 돌아오는 주인은 하루 온 종일 개 밥그릇 걷어차기 놀이를 하며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 빈 집을 안전하게 지켜 준 충견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반려동물 중에도 개는 유독 인간을 잘 따르고, 때로는 인간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쳤던 순교 견의 이야기가 고려시대 때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다. 전북 임실군에 가면 보은의 개라는 뜻을 지닌 오수라는 지역이 있다.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 때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를 몹시 사랑한 그는 출타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주인이 장에 다녀오면서 술에 만취되어 길에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다. 때마침 인근에 산불이 나 불길이 번져 주인근처로 오자, 다급해진 개는 주인을 깨우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으나 소용이 없자, 물속에 뛰어 들어가 온몸에 물을 묻혀 주인 주변을 적시는 일을 수백 번 반복해댐으로 불길을 겨우 막았다. 그러다가 결국 개는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는 개의 의리에 감탄하여 개를 그곳에 묻어주고 무덤위에 지팡이를 꽂아 놓았다. 그런데 그 후 지팡이에 싹이 나서 큰 나무로 자랐다. 그래서의리 있는 개나무고장이라는 뜻으로 오수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교적 안방에서 호위 호식하는 애견들은 조상 순교견의 희생을 잊지 말 것이거늘.

 

   태어난 아이들은 어느 새 성장하여 부모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애완견들은 반려동물이 되어 거실에도, 차에도, 산책이나 운동하는 자리에도 그리고 품 안에도 반려되고 있다. 집 안에서 답답하게 지낼 수 없어 가볍게 천변을 걸으며 운동하려고 외출하게 되면 반려견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이 눈에 띤다. 사람의 품에 안긴 채 동행되는 것까지야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목줄에 의해 이동하는 반려견을 만나게 되면 조금은 당황스럽고 경계심이 발동한다. 진행방향을 갑자기 가로막기도 하고, 다가와 냄새를 맡기도 하며, 제법 큰 개인데 입에 안전망이 씌워져 있지 않으면 무섭기까지 한다. 승용차를 타고 가다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데 옆 차에서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무심코 고개를 돌리게 되면 반쪽 열려진 차창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는 반려견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반려견 주인들은 상대방에게 온화한 관계 형성을 위해서 보다는 어린 개를 의미하는 강아지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반려견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죄수들 사이에는 담배를 일컫는 은어를 강아지라고 말한다는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산책하다 마주친 개들은 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전신주나 나무 또는 풀 섶에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것일까? 개는 그곳에서 다른 개의 오줌 냄새를 맡으면서 자신이 처세해야 할 세력의 판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개의 오줌에는 자신들의 명함과도 같은 성 호르몬이나 페로몬이 포함되어 있어 어느 특정한 자리에 오줌을 배설하여 자기의 위상을 표시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냄새 촉을 통해 품종이나 성별은 물론 크기나 성숙도, 연령 그리고 신체적인 강함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개는 나무 아래나 풀 섶이나 다른 사람의 차바퀴에 오줌으로 마킹을 하여 자신 있게 세력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냄새를 맡는 즉시 줄행랑을 치듯이 그곳을 떠나려고 한다. 이것은 그 냄새의 주인이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쓸데없는 분쟁의 소지를 만들지 않으려고 꼬리를 내리는 행위이다.

 

   미디어경영학에서는 매체와 인간을 개에 비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기대와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워치독(Watch Dog)’이 그것이다. 언론학자들은 신문, 방송 등 미디어 매체들의 기능과 역할을 사회감시기능감시견(監視犬)’이라고 말한다. 국가통치수반인 대통령에게도 감시견 역할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마련된 기구와 직책이 있다. 내각의 각료와 국정원, 검찰, 경찰, 대통령비서실, 국세청 등 행정부가 있고 입법부인 국회와 법 집행을 하는 사법부 등도 있다. 이른바 삼권이 분립하여 국가기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국가통치행위는 신호등 없는 교차로가 되고 만다. 다른 표현으로는 개판 오 분 전이랄까? 국정이 개판이 되면 피해는 국민이 본다. 지나친 감시와 관여는 추진력을 잃게 만들고 일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방만은 그릇된 질서가 판을 치게 만들 수도 있다. 옳은 진행이 될 때 힘을 실어주고, 그릇된 것은 속히 꼬리를 내리게 만드는 적절한 조화와 견제가 필요하다. 반려견의 목줄처럼 말이다.

 

   산책하려니 불현 듯 반려견의 방해가 떠올라 오늘은 가까운 야산을 선택했다. 마스크를 쓴 체 헉헉거리며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중 가수 나훈아가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하며 철학적인 절규를 토해내듯이 산 중턱의 바위에 기대어 탁주 한 잔을 걸치신 듯한 노인께서 세상을 향하여 탄원하시는 음성이 또렷이 들려온다. “젊은 것들이 지 시아버지 시어미는 안 모시려고 하면서 개새끼는 날마다 졸졸 끌고 다니고 부둥켜안고 잘도 다니면서 이렇게 멀쩡한 사람을 어떻게 하면 요양병원에 처넣을까 궁리만 하고 있으니 세상 참. 말세여 말세. 안 그려요 선생 양반!”노인의 외침은 집에 돌아와서까지도 귀전에 메아리로 울림을 주었다.

 

   지금 지구촌의 모든 인류는 감염병으로 어려운 시절을 지내고 있고 창조주 하나님은 그 모든 인류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 분은 지켜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서 고치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영원토록 반려(伴侶)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번 성탄절 즈음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새 해 19일께나 오신단다. 외국에서 성탄 이브에 맞추어 우리나라에 입국은 하시겠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두 주간 자가 격리 한 후 활동을 재개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좋은 기회다. 우리가 나서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들고 춥고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 두려움과 염려로 갇혀 지내는 사람들과 반려의 길을 걸으며 희망을 주고 어깨 뽕을 세워주는 삶을 나누자. 또한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성경을 통해 추적해 봄으로 난세에 귀감이 될 믿음의 족적을 깊이 아로새길 수 있다면 코로나19의 철장에 갇힌 인생이 아니라, 코로나19보다 더 두렵고 큰 아픔을 안길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길 힘을 축적하는 호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2)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지구상에는 약 500여 종의 개들이 있다. 영국의 애견가클럽은 수렵견인 하운드(Hound), 실용견인 유틸리티(Utility), 조렵견인 건독(GunDog), 테리어(Terrier), 사역견인 워킹(Working), 애완견인 토이독(ToyDog)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족보를 가진 개들이나 목줄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개들이나 나름 충견(忠犬)이라고 생각하며 한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분명 그 중에 똥개(糞犬)도 있을 것이다. 나는 충견과도 같은 충성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아니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돕는 배필의 위치가 분명하며, 말씀의 목줄에 잘 통제되어 하나님과 반려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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