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는 설렘은 금장의‘中’자가 계급장처럼 한 가운데 박혀있는 검정 학생 모자를 구입함으로부터 현실이 되었다. 속으로는 초등학교의 유전자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이제 중학생이 된다는 생각이 어깨에 의젓함의 견장을 잔뜩 치켜세운 체 시장 통에 들어섰다. 엄마가 씌워주는 모자는 조금만 머릿짓을 해도 이마를 훑고 내려와 눈을 가렸다. 조금 큰 것 같다는 눈치를 전달해도 엄마는 한사코 조금 큰 것을 사야한다 시며 그것을 선정해 주셨다.
아마도 성장할 시기인지라 머리둘레도 커질 것을 예상하신건지 아니면 개척교회의 어려움이 크니 이것으로 잘 버티라는 의미인지는 몰라도 내 소유의 모자가 생겼다는 감격은 일단 모자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간에 나의 나이테를 약간 벗어난 조금은 넉넉한 크기와 길이의 신발과 바지와 셔츠로 나이테 껍질을 덮어 주셨음에 길들여 진터라 이내 마음을 다 잡고 기쁜 마음으로 새 모자를 옆구리에 끼었다.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는 안내양 누나에게 눈길 줄 여력도 없었다. 내내 주변 사람들에게 반짝이는‘中’자가 선명히 보이도록 모자를 오른 무릎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렸다. 막상 첫 등교가 다가올 즈음에 빡빡머리를 하고 교복을 정제(整齊)하고서 거울 앞에서 모자를 눌러 쓴 체 중학생 된 신고를 하려는 순간 문득‘이건 아니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빡빡머리를 미끄덩하더니 눈두덩이 언덕에 걸칠 겨를도 없이 콧등에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곁에서 지켜보던 형은 재빠르게 찐한 형제애를 실현해 주었다. 신문지를 곱게 접어 모자 안창에 끼어 넣어 모자가 잘 안착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모자가 내 머리에 길들여지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8)
‘길들여진다’는 말을 풀어 말하자면, 맞추어 익숙해진다는 것이다.‘길’의 어원은‘길들이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길나지 않은 곳을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발로 다지면서 걷다보면 어느 새 사람들이 발 편하게 걷는 익숙한 길이 형성된다.
우리는 나를 나 되게 만드는 수많은 길들여짐 속에서 살고 있다. 옷이 그렇고, 신발, 승용차, 칫솔, 치약 짜는 것, 숟가락과 젓가락질, 언어, 표정, 걸음걸이 그리고 부부와의 관계성 등 말이다. 잘 길들여져 최적의 상태가 되면 편리하고, 유용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된다. 그러나 잘못 길들여지면 어그러짐이 날로 심해져 많은 것을 소실하게 되기도 한다.
미국 대서부 시대에 방목장에서 일하던 목축업자들은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야생마들을 길들였다. 우선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에 마구를 달고 화물 운반용 말과 묶어서 목장 안에 풀어놓는다. 그러면 야생마는 화물 운반용 말의 엉덩이를 뒷발로 걷어차면서 밀가루 포대를 끌듯이 이리저리 질질 끌고 다닌다. 하지만 목축업자들은 본시만시하며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화물 운반용 말이 어느새 유순해진 야생마를 끌고 주인 앞에 나타나게 된다. 야생마는 화물 운반용 말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동안 발버둥 치지만 나중에는 제풀에 꺾이게 되고 이내 길들여지는 것이다.
길들여짐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무엇에 길들여진다는 것이 아닐까? 불순종이 순종에게 길들여지고, 원망과 불평이 감사에 길들여지며,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에 길들여져야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로 길들여져야 한다.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 잘난 맛에 제 멋대로 자란 고구마순은 뻣뻣하다. 그러나 뜨거운 물에 한 숨 재이거나 소금을 뿌려두면 이내 부드러워져서 요리사의 손끝에 잘 길들여지고 맛깔만 음식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래서 길들여짐은 내 숨을 죽이는 것이다.
늑대와 개는 유전적으로 98% 일치하는 동물이다. 갓 태어난 늑대의 새끼를 포획해 집에서 정성을 다하여 키우지만 몇 달이 못 되어 사람의 손을 타지 아니하고, 약 2년이 지나게 되면 늑대의 야성이 드러나 큰 위협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개는 정성을 다하는 만큼 사람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사랑을 주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동물이 된다. 늑대는 야성을 곧게 세웠고 개는 야성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옛사람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면 그의 별칭은‘억지 춘향’이 된다. 억지 춘향은 고대 소설『춘향전』에서 변 사또가 춘향으로 하여금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하려고 구슬리고 어르다가 끝내는 핍박까지 한 데서 나온 말이지만, 안 되는 일을 억지로 우겨서 겨우겨우 이루어지게끔 만든 일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의 공로는 점 하나도 섞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지만 아직도 성령님의 이끄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못하고 억지 춘향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된다면, 사탄의 죄에 대한 수청 요구와 그로 인한 핍박은 끊일 날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어느 덧‘내비게이션’에 길들여져 여간해서는 거역하지 아니하고 순종하게 된다. 폭우가 내리는 날 서울에서 회의가 있고 이어서 다른 일정이 있어 승용차를 타고 상경하게 되었다. 넉넉하게 출발했던 시간은 어느 덧 도착시간이 초조함으로 10분전, 5분전, 3분전으로 간격이 좁혀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의 이정표가 보일 즈음에 내비게이션은 다른 길로 우회할 것을 종용한다. 순간 갈등이 일었다. 이제까지 내비게이션에 죽도록 충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대로 순종하며 길들여졌던 나는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왕복하며 길들여졌던 그 길을 고수했다. 몇 Km쯤 진행했을까? 여러 대의 차량이 추돌하여 도로가 아수라장이 되었고 옴짝달싹 못하다가 미안함에 여러 사람 앞에 숨죽인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숨 죽여지고 풀 죽게 되면 버려진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주인이시며 요리사인 하나님 손에 의해 맛깔난 인생으로 거듭나게 된다. 주님의 보혈에 충분히 적셔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녹아지게 되면 언제 어디서든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맛깔인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길들여지면 당장은 사는 것 같지만 이내 죽음을 초래하게 되고, 하나님께 길들여지면 죽는 것 같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것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 저 것 따지며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솥단지에 믿음으로 나를 내 던져 빨리 숨을 죽여야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숨 죽여지지 아니한 그래서 길들여진 척 하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을 손대고 계신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겉모습만으로 겉도는 신앙생활을 했던 나. 영과 진리로의 예배가 아니라 형식적인 예배를 했던 나. 행함과 진실함으로 거룩한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 이익과 이기심의 화신이 되어 관계 형성을 해왔던 나. 세상을 향한 희망의 등대불이 꺼진 줄 모르고 성전 안에서 자기들만 불 밝히고 희희낙락해왔던 교회들. 하나님은 채찍을 드셨다.‘코로나19 팬데믹(대창궐)’으로 말이다. 믿음의 사람은 그것이 죽음으로 귀결될 채찍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께 길들여짐으로 나아오라는 사랑의 채찍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골방에서 가슴을 치며 살려달라고, 치유하여 주시라고, 회복시켜 주시라고 부르짖고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세아 6:1)
정부와 중앙대책본부는 대처 수준을 2.5단계 수준까지 격상시키며 국민 안전과‘사회적 거리두기’일환으로 성전의 현장예배를 제한하고 있다. 방역과 지침을 따르는 것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당연한 것이며 그것은 결국 나와 가족의 생명을 보위하는 길이다. 정부는 코로나19를 종식시키고 서민 경제를 살리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교회는 코로나19를 이겨내고 예배를 지켜야 한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명기 12:13-14)
도로를 지나다 보니 플래카드에‘사회적 거리는 2m, 마음의 거리는 0m’라고 아주 멋진 글이 적혀있었다. 그런데‘사회적 거리는 2m, 마음의 거리는 0m’라고 적혀있는데‘사회적 거리는 2m, 하나님과의 거리는 무한대’라고 읽혀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65:4)
그나마 길들여졌던 성전 현장예배가 타의 반, 자의 반에 의해 무너지고 퇴락해가고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다시는 무너지고 퇴락하지 않도록 수축하라고 채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무너짐이 심함으로 뒷걸음질 치는 한국교회의 양상과 그리스도인의 처세가 가슴이 메어지도록 아프고 또 아프다.
그렇게 유약한 성도들로 만든 내 책임이다. 잘 길들여진 성도로 착각하며 안일하게 대처한 내 탓이다. 평소에 하나님께 철저히 길들여짐이 이렇게 복되고 멋진 것임을 더 많이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나의 과오이다. 눈물 젖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이 길만이 살 길이다”더 크게 외치며 생명의 말씀에 온전히 길들여주지 못한 나의 태만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기도는 얼굴이 무릎 사이에 박힌다. 땀이 솟구치고 핏방울처럼 바닥에 패인다.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멍듦이 살색이 되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누가복음 23:27)
이대로는 안 된다. 마스크에 길들여진 호흡, 지난날을 수놓았던 일상을 잃어버리고 잊혀 짐에 길들여지고 있는 나날들, 예배가 희미해지고 육신의 안식과 향락에 주의 날을 나의 날로 대신 투자됨을 자연스러움으로 길들이고 있는 나의 모습들 그리고......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길들여져야 할 때가 왔다.‘위기’는 위험 속에서 붙잡는 기회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예배를 생명과 같이 여김이 길들여져야만 한다. 우리 주님이 보혈 젖은 발길을 구원해야 할 사람 숫자만큼 왕래하시며 길들인 십자가의 길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고 닦아 길들인 진리의 말씀 앞에 숨 죽여 길들여져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그 생명 으깨어 우리가 믿음으로 최적의 길을 걷게 만들어 주신 생명을, 복음으로 온전히 내 것으로 취한 삶에 길들여야 한다. 내 숨과 한국교회의 숨이 죽어야 하나님의 숨이 내게 주입되어 영원토록 하나님께만 잘 길들여진 그리스도인의 걸음을 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길들여질 나의 첫 발걸음을 올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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