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 교회소개 >
  • 목양칼럼
마음의 등불
임현희 2020-05-25 추천 11 댓글 0 조회 1116

인간에게는 세 종류의 눈이 있다. 첫 번째는 육신의 눈이다. 육신의 눈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두 번째는 마음의 눈이다. 마음의 눈은 때로 미운 것도 곱게 보고, 고운 것도 밉게 본다. 한 예로, 결혼한 아들이 주방에서 며느리를 도와주는 것을 보면 화가 나도, 사위가 딸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 예뻐 보이는 것은 마음의 눈이 가진 마력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눈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영안이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이 바라보는 초점은 타자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묵상이 없어도 이 눈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영적인 눈은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다. 자신에 대한 무지는 영적인 눈의 최대 적이다. 자신의 존재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영적인 시력은 높아진다. 영적인 눈은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고 소망하는 절대적 존재의 빛이 내 영혼 속으로 들어올 때 비로소 개안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영안이 밝게 열리길 기도한다. 주님을 더 확실히 알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안을 가지고 주님만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바로 볼수록 주님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3-5)

 

   탈무드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나온다. “사람의 눈동자는 흰자와 검은자가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 눈동자의 검은자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셨을까?”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인생은 어두운 곳을 통해서 밝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눈은 동공과 홍채와 공막으로 이루어져 있고, 창틀이라고 할 수 있는 눈매의 아름다움은 눈꺼풀의 피부, 근육, 눈썹, 눈 꼬리의 총체적인 느낌으로 이루어진다. 눈매의 넓이는 코 넓이와 비슷해야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다. , 양미간의 넓이는 한쪽 눈의 넓이와도 일치하는 것이 예쁘다고 한다. 평균적인 여자의 눈의 넓이는 25.5~37.5mm이고, 남자는 26.5~38.7mm 정도이라고 한다. 눈꺼풀의 자연스런 곡선도 검은 눈동자의 바깥쪽 수직선에서 가장 높은 커브를 그릴 때 자연스럽다고 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창이라고 일컫는 눈을 꾸미기 위해 견적을 내고 과감한 투자를 한다. 물론 창틀만 바꿔도 사람이 달라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예뻐지기 위해서 쌍꺼풀 수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눈 건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눈이 사람의 인상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래서 얼굴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눈으로 바깥세상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는 80%가 넘는다. 대화하는 순간에 말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눈으로 보면서 진위나 호의를 감지하여 판단하게 된다. 눈은 돌출된 뇌라고 생각해도 좋다. 좋은 눈은 눈의 흑과 백이 분명해야 한다. 만약에 누구를 몹시 미워하면 그 사람의 눈에는 살기와 광기가 돈다. 깊은 생각을 하고 명상을 많이 하는 사람은 눈빛이 그윽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사람은 눈동자가 깊지 않게 재빠르게 움직인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눈에는 총명한 빛이 감돌고, 아무 생각 없이 자다가 일어나거나 희망 없이 사는 사람은 눈에 빛이 없다. 몸이 아픈 사람도 눈에 힘이 없고 눈빛이 약하다. 사랑을 할 때는 눈이 호수처럼 더 맑아지기 때문에 연인들은 그 속에 퐁당 빠지고 싶고 주변 사람들은 예뻐졌다고 말한다. 피곤하거나 싸울 때는 눈에 핏발이 서고, 이유 없이 핏발이 서면 다투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쉬거나 마음을 가다듬는 작업이 필요해진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가 1:15)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태복음 6:23)

 

   성경은 사람의 눈을 마음의 창문을 뛰어넘어 마음의 등불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눈과 어우러진 눈언저리를 보면 잔잔하게, 그윽하게, 포근하게, 자글자글하게 잘 아로새겨진 인품과 삶의 자취가 어려 있다. 눈매는 하루아침에 일군 텃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생각, 삶의 자리, 바라보는 시선, 안착한 위치에서 수없는 반복에 의해 나의 눈언저리에 안착된 인생 그림이기 때문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태복음 6:22)

 

   내 마음은 여실히 눈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등불처럼 비춰진다. 두려움에 파르르 떠는 등불, 불안감에 초점을 잃은 등불,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등불, 절망감에 캄캄해진 등불도 있겠고, 기쁨에 반짝이는 등불, 성공했음에 축포를 터트리는 등불, 편안함에 몽환적인 등불, 따뜻함에 포근히 안기는 등불, 감사함에 세포에 촘촘히 젖어드는 등불이 있다.

 

   나는 여태껏 생애를 수놓아 오면서 내 마음의 등불로 빛을 내는 가로등 아래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기댐을 허락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기쁨과 환희와 감사와 사랑의 사람들이 머물렀는지, 아니면 슬픔과 절망과 이별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가로등이었는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감염의 환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와 더불어 마스크 착용이 생활 속에 보편화 되었다. 요즘 같아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공공의 적처럼 여겨져 멀리서부터 발걸음의 향방을 조율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얼굴에 자리한 이목구비 중에 눈이 부각되어 비슷하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스치는 사람들의 눈을 눈여겨보게 된다. 신기한 것은 다른 얼굴 부위가 가려지고 눈만 보이는데도 기꺼이 허락받지 않고서도 그들의 지나온 삶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얼른 책상머리에 앉아 약간은 확대해서 보이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눈에게 다양한 명령어를 투입시켜 억지로 표정을 지어 보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눈 꼬리와 입 꼬리가 동의어라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입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도 말하고 있었고, 눈만 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입도 표정을 짓도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엇박자를 연출할 수 없는 구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 심장이 두둥하고 손사래를 친다. 내 마음의 생각이 눈과 입으로 표출되는 것뿐이라고.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언 23:26)

 

   백열전구나 전자관 안에서 전류에 의해 가열되어 전기 에너지가 빛에너지와 열에너지로 바뀌게 만드는 가는 금속선인 필라멘트’(filament)가 있다. 필라멘트가 전류에 의해 뜨거워져서 밝은 빛을 내는 것인데, 과거에는 탄소, 백금선, 무명실, 대나무 등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텅스텐을 사용한다. 텅스텐은 녹는점이 3400이기 때문이다.

 

   백열전구로 가정을 밝히던 시절에는 꼭 밤에 사단이 났다. 하기야 그럴만한 이유는 어두워진 밤이 되어서야 빛이 필요하고, 그제 서야 백열전구의 존재가 인식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30W, 60W 다른 말로 30, 60촉 전구의 스위치를 돌려도 빛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전구를 빼서 흔들어 보면 그 안에서 째르르하며 뭔가가 움직인다. “또 촉이 나갔다고 하며 누군가가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을 걸어 동네 어귀에 있는점방에 다녀와야 그 날 밤 온 가족이 빛 가운데로 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으레 그 당번이 나에게 자주 당첨되었던 것 같았다. 백열전구 하나를 사들고 집에 당도하기까지 왜 그리 길도 멀고 걷는 길에 돌부리도 많았던지. 작은 손으로 감싸 조심스럽게 걸어오면서 만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백열전구를 잡은 손은 높이 들고 넘어 지리라를 되 뇌이며 걷다가 간간이 전구 안에서 째르르소리가 나는지 몇 번이고 흔들어 보았다.

 

   그 어떤 이유로라도 내 마음의 등불의 필라멘트가 째르르하고 단절되게 되면 내 눈은 째진 눈, 흘기는 눈, 살기 어린 눈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텅스텐을 재료로 한 필라멘트의 녹는점은 3,400이라고 하는데 내 눈의 마음의 등불 필라멘트는 무엇을 재료로 하고 있는 것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기어린 눈을 가지고 다메섹을 향하여 서슬파란 마음을 옮기고 있는 사울을 한 길목에서 멈춰 서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옥에 가두고 목숨을 빼앗는 광기가 짙게 나는 광란의 등불의 촉을,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을 발하여 그를 말에서 내동댕이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촉 나가버린 사울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야 운신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촉 나간 사울을 제자 아나니아에게 연결시켜 안수함으로 수리를 맡겼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는 우리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도구를 사용하여 비늘 같은 떨어진 촉을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과 성령 충만함이 잘 섞여 재료가 된 필라멘트를 장착시켰다. 그 순간 전구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 그 촉의 밝기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밝게 비추이는 빛으로 밝혀졌다.

 

   우리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촉 떨어질 눈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는 일이 추호도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 내 판단과 의지와 주장과 아집과 고집된 습관으로 만들어진 필라멘트로 불 밝힌다고 으스대다가 하나님의 콧김에만도 촉 떨어지게 되면 앞을 볼 수도 없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영혼의 나락에 내 던져진다. 하나님은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눈의 창틀만 교체할 것이 아니라 멋지고, 제 빛을 발하며, 그 빛이 오래 갈 마음의 등불이 되도록 영혼의 필라멘트로 교체하기를 원하신다. 무상으로 마음껏 재료를 공급해 주시면서 말이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스크 넘어 다가서는 마음의 등불이 밝고 맑고 아름답기를 소원해 본다. 그리고 내 마음의 등불로 인해 예수 그리스가 잘 보여 지기를 기도한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편 19:8)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길들여짐 임현희 2020.08.29 14 1048
다음글 불어라 꽃 세움 바람아 임현희 2020.03.15 11 1166

561203 TEL : 063-211-4475 지도보기

Copyright © 전주팔복산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