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은 오늘도 신선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산길을 걸어 물동이를 가득 채워왔다. 가녀린 양 어깨에 지탱된 물지게의 출렁임을 덜하기 위해서 곱디고운 꽃 걸음으로 산 길을 밟았다. 그러나 집에 도착할 때면 번번이 오른쪽 동이의 물이 상당히 흔적 없이 사라진 듯 했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어깨를 짓누르게 했던 왼쪽 물동이가 미안해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지만 먼 산길을 오가며 균형 잡느라 고생도 하고, 그 고생으로 헛수고가 된 아쉬움을, 뒤돌아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구슬땀을 닦는 것으로만 대신했던 아낙 주인에게 미안함이 더 했다.
사실 오른쪽 물동이는 언제부터인가 작은 균열이 생겨 아무리 숨을 졸여 쉬어도 몸에서 졸졸 새어나가는 아쉬움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나게 봄노래를 부르며 물동이를 어깨에 메었던 아낙에게 미안함의 고백을 아니 할 수 없었다.“저~기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한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오른 물동이의 봄바람처럼 훅 들어온 말에 놀란 것은 아낙이었다. 아낙은 봄꽃 화사함으로 오른 물동이의 말에 귀 기울였다. 졸졸 빠져나갔던 물줄기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오른 물동이는 말한다.“언제부터인가 제 몸에 이상이 생겼어요. 최대한 숨도 참아가며 막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어요. 주인님의 뒤뚱거림과 왼 물동이의 고생함이 영 마음에 걸려 말씀드려요. 저는 더 이상 주인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물동이 인가 봐요. 이제 저를 버려주세요.”
아낙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봄꽃 화사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다음 날 아침은 왠지 오른 물동이만 초대를 받아 산길을 나란히 걸었다. 가는 길은 주인님의 숨 고동소리만 들을 수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더욱 옥죄어 오는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은 틈새는 속도 모르고 주책바가지처럼 아까운 물을 연신 산 길가에 흩뿌리며 뒤 따랐다. 그 순간 아낙은 말을 열었다.“오른 물동이야! 이 좁은 산길 어느 쪽에 예쁜 꽃이 피었는지 보이느냐”“예, 오른쪽 길 가에만 꽃이 예쁘게 활짝 피어있어요.”“그래, 이 예쁜 꽃들은 네가 피워낸 것이란다. 네가 매일 아침 이 곳을 지나면서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꽃비를 내려 주었기에 이 이름 모를 꽃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난 것이란다. 너는 쓸모없는 물동이가 아니라 나와 우리 가족에게도, 이 예쁜 이름 모를 꽃들에게도 소중한 천사와 같은 존재란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3-4)
이름 모를 잡초들은 오른 물동이의 헌신을 잊지 않고 저 마다의 예쁜 꽃을 피워 묵묵히 산길을 지키면서 봄의 마음을 가진 행인들에게 화사한 미소를 안겨 주었다. 사람들은 그 화사한 미소를 품은 야생화들에게 화답하는 마음으로 노루귀, 산자고, 복수초, 산작약, 각시붓꽃, 너도바람꽃, 노란제비꽃, 앵초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야생화들은 이름에 걸 맞는 미소를 지으며 문득 하늘을 보았다. 그네들 못지않게 하늘을 가득 담은 넉넉한 미소를 가진 덩치 큰 꽃나무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난, 매화꽃, 산수유, 목련, 해당화, 진달래라고 해”
봄꽃들이 들녘의 향연에 온화함을 더해주며 봄의 교향곡이 절정에 달하여 눈 가에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모든 것이 파스텔 톤으로 변해가려 할 즈음, 난데없이 일그러진 심벌즈 소리가 잔잔한 봄의 감성을 깨트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나고 흔들리는 것을 보니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금방 알아 챌 수 있었다. 그네들의 이름은‘꽃샘바람’이다. 꽃을 시샘하여 부는 바람이라는 의미 일게다.
아마도 이 이름은 봄의 교향곡을 연주하던 봄꽃들에게서 나온 이름이 아니라, 감상하던 청중들에게서 만들어진 이름인 듯싶다. 봄의 전령사들을 통해 겨우내 묵었던 숨통을 트여내고 굳어진 표정을 화사함으로 번지게 만드는 꽃의 아름다운 행보를 바람이 샘 부리며 마구 흔들어대고, 견디다 못한 꽃잎 악기들은 어쩔 수없이 땅에 내 던져지는 모습으로 보였을 게다. 이를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한 인간들은 저마다 바람을 향하여 한 마디씩 해댄다.“에이, 꽃샘바람 같으니라고!”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시편 68:16)
바람이 잦아든 시간 꿀벌들은‘앵앵’거리며 여기 저기 꽃방을 찾아들며 그 꽃잎을 확성기로 삼아 인간들에게 말한다.“여러분! 지금 불었던 바람은‘꽃샘바람’이 아니라‘꽃 세움 바람’이에요.”라고 말이다. 이때다 싶은 바람은 잘 하모니 된 봄꽃 교향곡의 향취를 코끝에 가득 실어 날라준다.
봄꽃들에게 부는 바람은‘꽃샘바람’이 아니라,‘꽃 세움 바람’이란다. 시샘하여 무너뜨리는 바람이 아니라, 반가움으로 요란하게 껴안으며 봄의 향연을 더욱 멋지게 하여 여름으로, 가을로, 겨울로 잇대어지도록 세워주는 바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욥기 29:23)
신영복 저(著)「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에도 보면“봄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합니다. 바람이 없으면 꽃은 늘어진 팔자가 되어 주야장천 잠만 잡니다. 바람이 불어야 아차차 놀라 꽃대를 올립니다. 그래서 꽃 피는 것을 시샘하는‘꽃샘바람’이 아니라‘꽃 세움 바람’이라 해야 옳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렇다. 시인의 표현대로 흔들리지 않고 핀 꽃은 없다. 실바람, 꽃바람, 가만한 바람, 명주바람, 솔솔바람, 산들바람, 고추바람, 된바람, 샛바람을 맞으며 가지 흔듦 작두질로 물을 길어 올려야 비로소 예쁜 꽃대를 세우는 법이다. 대추 한 알도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를 머금어야 붉어지며, 강물도 이리 저리 굽이쳐야 진짜 강한 물이 되어 바다에 입학할 자격을 얻는다. 밋밋한 종이도 이리 접히고 저리 구겨져야 종이비행기가 되어 창공을 나는 호사를 누린다.
지금 우리에게는‘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호흡기 문턱까지 와서 알짱거린다. 어떤 사람은 그 유행 안 되고 감염 안 되어도 될 감염병이 나의 믿음을, 나의 건강을, 나의 활기찬 들숨과 날숨을 시샘하여 감염 바람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나 죽었다’고 단언(斷言)하고 그 귀한 모습들을 단행(斷行)한다.
그러나 여전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바른 하나님의 자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령 충만한 성도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로, 세상과 환란 속에서 빛과 소금이며 소망을 주는 자로 세우시는 잠시 흔듦으로 받아들인다. 그 옛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일으켜 세웠고, 복음이 이방인들의 영혼에 세워지는 촉진제가 되었듯이, 봄바람은 나뭇가지를 일깨워 삼투압 펌프질을 하게 만들고, 꽃가루에 생명의 날개를 달아 사랑의 교제를 하게 만들며, 값진 노동을 하는 꿀벌들의 날개를 가볍게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일어나 다시 세움 받아 내 영혼과 인생의 봄날을 향해 정진하게 만들어 준다.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가 2:12-13)
바람이 분다. 봄바람이 감염병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다가왔다.‘시샘바람’으로 맞을 것인가 아니면‘세움 바람’으로 맞을 것인가?
제목은‘꽃샘바람’이지만 내용은‘꽃 세움 바람’으로 해석한 김진영 작사 작곡의 동요‘꽃샘바람’을 봄 꽃잎 위에 살포시 마음 얹어 들어본다.
일어나요 일어나요 봄이 왔어요/ 꽃샘바람 꽃잎들을 깨우네/ 알았어요 알았어요 지금 나가요/ 목련 꽃잎 하얀 얼굴 내미네.
일어나요 일어나요 봄이 왔어요/ 꽃샘바람 꽃잎들을 깨우네/ 알았어요 알았어요 지금 나가요/ 개나리꽃 노란얼굴 내미네.
일어나요 일어나요 봄이 왔어요/ 꽃샘바람 꽃잎들을 깨우네/ 알았어요 알았어요 지금 나가요/ 진달래꽃 분홍얼굴 내미네.
일어나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봄이 왔어요 봄이 왔어요 봄이 왔어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불어라 봄바람아! 불어라 꽃 세움 바람아! 불어라 성령의 불 바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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