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처음 뜨는 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즈음에 웬 돼지그림들이 핸드폰을 통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그 중에 한 움짤은 하늘로부터 돈다발이 두루룩하고 쏟아져 황금돼지 입 속으로 쏠려 들어가고, 황금돼지는 배 터질 만큼 행복한 미소를 짓는 영상이다. 그 영상을 보면서 갑자기 ‘세상 복(福) 너무 추구하다 보면 복(腹) 터진다’는 생각이 들면서, 개구리가 황소와의 몸집크기 내기 싸움에서 뒤질세라 허세부리며 뱃속에 공기를 빵빵하게 주입하다가 급기야는 배가 터져 죽었다는 이솝(Aesop) 우화가 겹쳐 지나간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야고보서 4:16)
올 해는 육십 간지 중 36번째 해인 기해년(己亥年)으로 ‘황금 돼지 해’로 일컬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잘 되어 집안에 황금 돼지가 들어온다는 건지, 아니면 돼지가 황금을 물어다 준다는 건지는 몰라도 괜스레 들뜬 기분이다. 얼마나 다들 살기가 힘들고 팍팍했으면 그러한 생각이 잠시라도 꿈처럼 삶을 지배한 것일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디모데전서 4:7)
돼지는 저금통으로 변신하여 어린 동심과 합체하여 절약정신과 ‘소원을 말해 봐’를 실현해 가는 꿈의 산실이었다. 어른들은 등쳐먹는 사람들 때문에 억울하고 눈물 짖게 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지만, 아이들은 등쳐먹는 돼지 저금통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일으킨다. 그러나 복병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법, 때로는 손버릇 안 좋은 가족들에 의해 아직 만삭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돼지 저금통의 주인 허락도 없이 몰래 제왕절개를 통해 돼지의 배가 홀쭉해지게 만들어 어린 동심을 멍울지게 만들었던 해프닝도 가족의 역사에 한두 번쯤은 서려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에게도 돼지와 결부된 지난날의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교직을 내려놓으신 이후에 황방산 자락에 있는 작은 동네 덕촌으로 이사하시어 교회당을 지으시고 이른바 ‘개척교회’를 시작하셨다. 오래 된 기억이지만 성전의 규모는 작았어도 믿음과 사랑의 규모는 대형교회의 면모를 갖추었던 그 때였다. 하루는 깨어 있음에서 가장 멀게 깊이 잠든 자정을 넘겼을 시간대에 양철 대문을 부수듯이 두드리며 간절하고 애절함이 뒤섞여있는 듯한 목소리로“목사님, 목사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를 비롯한 우리 오남매 모두가 한국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놀란 가슴으로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온 동네의 ‘개 조심 씨’들도 저 마다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며 누구 집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일 났다는 경보음처럼 짖어대는 통에 놀란 것은 우리 집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연인즉슨, 한 여 집사님 가정에서 키우던 돼지가 새끼를 낳으려고 막 산통을 시작했으니 순산할 수 있도록 목사님께서 오셔서 기도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런 순수한 믿음이 그립다 못 해 존귀하게 느껴지기 까지 하지만, 그 때는 어린 마음에도 그 상황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어쨌든 그날 꼭두새벽에 우리 가족의 대표위원으로 아버지와 어버니께서 파송을 받으셨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 온 동네방네에 아침 안개처럼 내려앉은 소문이다. “간밤에 우리 집 돼지가 산통을 하여 목사님을 초청하여 기도를 받았더니 한 여섯 마리 정도 새끼를 낳을 줄 알았는데 아홉 마리나 출산하게 되었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그 이후로 한 동안 성도들 심방보다는 동물들 심방이 많아졌던 것 같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목회 초년 시절 나의 부모님은 유독 아들이 설교할 때마다 몹시 긴장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진중하게 들으시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경청하심이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말씀이 적으시기도 하셨지만 단 한 번도 설교에 대해 직접적으로 칭찬을 하신다거나 어떤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간혹 어머니를 통해“너의 아버지가 우리 아들 설교 참 은혜롭게 잘 한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믿음과 사랑의 용기를 전달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하루는 낮 예배를 마치고 목양실에 앉아 있는데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더니 아무 말씀을 안 하시고 조그만 쪽지를 건네고 곧 바로 나가셨다. 그 쪽지에는 ‘돼지(○), 되지(×)’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한 참 후에야 아버지의 마음이 전달되었다. 그 날 설교는 마가복음 5장에 기록된 말씀을 본문으로 삼았는데,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두 사람을 만났는데 이미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들이 괴롭히지 말 것을 간청할 때, 예수님께서“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꾸짖으시며 이름을 묻자, 귀신은 많음을 의미하는 ‘군대’라 말했다. 그러면서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며 산 곁에서 먹고 있는 돼지의 큰 떼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주님의 허락으로 군대 귀신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니 이천 마리가 되는 돼지 떼는 귀신을 감당치 못하여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고, 우리 주님은 귀신이 지폈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큰 일을 행하심으로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 앉아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날 설교에는 이 성경말씀의 내용으로 설교를 하면서‘돼지’라는 단어를 수차례 사용하였지만 좀 더 입을 열어 발음을 정확히 했어야 하는데, 빨리 언어를 구사하다보니‘돼지’를‘되지’라고 발음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돼지’라는 단어를 구사할 때면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발음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살아 움직이는 돼지에게서는 웃는 낯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돼지 저금통이나 돼지를 형상화한 조각품이나 인형은 대부분 웃는 낯을 하고 있다. 어색하게 위로 솟은 귀때기와 들창코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웃는 사람 낯에만 침을 못 뱉는 것이 아니라, 웃는 돼지에게도 침을 못 뱉는 것 같다. 오히려 웃는 얼굴에 돈을 먹잇감으로 물려주기도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획하는 일이나 집안이 잘되게 해 달라고 음식 등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미신적인 행위인‘고사’(告祀)을 지낸다. 고사상의 한 중앙에는 으레 돼지머리가 포진되어있다. 그 돼지머리의 표정을 보면 눈을 지긋하게 감은 채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콧구멍이나 입에 값나가는 지폐가 물려져 있어서일까 아니면 난생 처음으로 곱게 면도를 해서 상쾌함의 미소일까? 아니다, 그렇게도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며 가두어 두고 머리통을 내치던 사람들이 넙죽 넙죽 절을 하니까는 흐뭇해서 만면에 미소를 짓는 것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돼지머리가 올려 져 있게 되는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 우리 민속인 윷놀이에서 ‘도’는 돼지를 상징하는 동시에‘시작’을 의미하여“첫도는 살림 밑천”이라고 일컫는단다.“시작이 반”이라 하므로 돼지머리를 차려 놓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돼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돼지’는‘도야지’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잘되기를 바라는 뜻의‘되야지’와 발음이 비슷하고,‘돼지’라는 말 역시 잘 되어가는 상태를 이르는‘되지’와 발음이 유사하기에 앞으로도 일이 계속 잘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돼지머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셋째, 돼지의 한자말‘돈’(豚)은 우리말‘돈’과 같은 소리 말을 내기에, 다산성인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듯 많은 돈을 벌어 부귀영화를 누리기 바라는 마음으로 돼지주둥이에 돈을 물리는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돼지는 노상 꿀꿀거려서 ‘꿀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연스레 ‘벌꿀’이 생각나도록 만들고, 또 돼지는 틈만 나면 꿀맛 같은 단잠을 자므로‘꿈’이 연상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에 돼지머리를 매개물로 하여 이상의‘꿈’이 실현되는‘꿀맛’같은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돼지머리를 사용한다고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일축하는 한 마디를 하라고 한다면“꿈보다 해몽이 좋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더 가슴에 힘주고 목청 돋우어 하고 싶은 말은“죽어서야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웃음을 지닌 돼지에게 잇대고 기대는 인생이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삶으로 그 주님에 의해 범사가‘잘 되지 인생’의 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전서 2:24)
살기를 탐하며 허탄한 것에 엎드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죽은 듯이 겸손히 엎드리자.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데 까지 반드시 일으켜 주시고 크게 웃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편 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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