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 메뉴판에 가지런히 적혀있는 ‘갈매기 살’이 바닷가 창공을 ‘끼룩 끼룩’하며 유영하는 갈매기의 살 인 줄 알고 있었던 때가 좋았다.
성탄절 새벽에 눈을 부스스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찾아내어 품에 안은 선물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친히 루돌프 사슴이 이끄는 눈썰매를 타고 오셔서 착한 사람에게만 주고 가신 선물로 알고 있을 때가 좋았다. 어르신에게 손아랫사람이“기침(起寢)하셨어요?”하는 인사의‘기침’이 어르신이 잠 자리에서 일어나셨음을 알리기 위해 하시는 헛기침 소리인줄로 알고 있을 때가 좋았다.
그런 좋은 마음으로 살아온 시절이 내게 있었다고 말하자, 가만히 곁에서 나의 이야기를 듣던 한 지인이“그러면 조선시대에 가장 유명한 음식은‘치킨’이고, 천국에서 가장 맛깔만 음식은‘김밥’이겠네”라며 은근히 순수한 영혼에 핀잔을 준다. 그 후로도 나는 한 동안 세발낙지는 발이 세 개라서 그렇게 이름 한 것으로 알고 살면서 이를 꽤나 아는 체했던 것도 사실이다. 무식(無食)하면 배고프기도 하겠지만 또한 무식(無識)하면 용감하다나. 하여튼 그릇되고 옅은 지식을 품고 있던 그 때도 좋았다. 그 좋은 때의 어느 날 어이없게도 사람들은 세발낙지가 그렇게도 맛있다고 입을 모은다.
비록 다리가 세 개일지라도 맛과 영양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맛이 조금 덜하더라도 다리가 되도록 많이 달린 낙지의 사촌격인 오징어를 더 탐닉(耽溺)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은 명절이 되면 아주 거창한 놀이를 했다. 이름 하여 ‘윷놀이’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창한 놀이라기보다는 내기를 하여 패한 팀이 마른 오징어를 사와 약한 불에 대친 후 먹는 거창한 파티가 더 큰 기대와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오징어라는 고급스런 이름 보다는‘수레미’라는 사투리를 사용하였다. 사실 수레미였기 때문에 웬 지 더 고소하고 구미를 돋우었는지도 모른다. 윷놀이에서 패한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점빵에 가서 수레미를 사가지고 와서 불에 구워 가져오기 까지는 온 가족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고, 순간의 초조함을 매우기 위해 거창한 놀이를 되짚으면서 연신 헛웃음을 관심의 창밖으로 흘려보내기도 했다.
접시에 꼬불꼬불한 자태로 올려 진 구운 오징어 한 마리에 온 가족의 시선과 후각이 초 집중되고 있다지만, 말은 하지 않아도 가족의 예민한 셈은 오징어가 방문턱을 넘어오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다리 열 개가 온전히 달려 있는지, 화룡점정 (畵龍點睛)과도 같은 오징어 배꼽(사실은 입과 눈)이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누가 먹게 될지 말이다.
이렇게 오징어 다리, 아니 그 다리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빨판까지 제대로 붙어있는지의 여부까지 예민하였던 시절이 있었건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먹을거리가 풍족해졌다 할지라도 다리 여덟 개 달린 낙지가 아니라 세 개 달린 낙지를 식탐하다니.
그런데 알고 보니 세발낙지는 다리가 세 개여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세발낙지도 다른 낙지와 다름없이 다리가 여덟 개인데 상대적으로 다리가 가늘어 ‘가늘 세’(細)자를 써서 세발낙지로 불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예 한문으로 ‘세족(細足)낙지’라고 하던지, 아니면 한글로‘가는 발 낙지’라고 해야지 이도 저도 아닌 세발낙지라고 하여 괜히 순수한 영혼을 착각의 뻘에 빠지게 만들었다.
세발낙지는 가늘고 쫀득쫀득하여 맛이 일품이고 타우린이 많이 함유되어 피로 회복에 아주 좋은 식품이란다.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겨울에는 틀어 박혀 구멍 속에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그 어미를 먹는다. 빛깔은 하얗고 맛이 감미로우며, 회나 국 및 포에 좋다. 이를 먹으면 사람의 원기를 돋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발낙지의 발 개수 논란은 여기서 접어두고 이제는‘세 발 그리스도인’을 찾기 위해 믿음의 뻘을 생각의 삽으로 깊이 뒤적여 보자. 벌써 ‘사람의 발이 두 개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하며 발끈하는 성질머리가 일어나는 사람도 있을게다. 그러나 좀 위트(Wit)있는 사람은 한 넌센스 퀴즈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다리가 네 개였다가, 다음에 두 개였다가, 마지막으로 세 개인 동물은?”이런 거 말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손과 발로 기어 다니니 네 발, 성장하여 직립보행을 하니 두 발, 노인이 되어 지팡이를 의지하여 걸어 다니시니 세 발이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무슨 세 발이 있단 말인가? 있다. 보았다.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많이 보고 있다. 그런 발을 믿음의 영역에 장착한 그리스도인을 보게 보면 기분이 참 좋다. 그 세 발은 이름 하여 ‘약발’‘악발’‘끝 발’이다. ‘약발’은 약을 복용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효험을 말한다. 건강에 약화가 일어난 사람은 의사의 처방에 의해 조제된 약을 복용하는 일에 그렇게도 심혈을 쏟는다. 만약에 투약 봉투에 ‘식후 30분 복용’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면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모른다. 마치 조금치라도 시간을 어길 것 같으면 약의 효험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약을 먹을 때면 한 알이라도 빠뜨리지 않도록 정성스레 손에 담아 병아리가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듯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하여 감격함으로 얼굴을 떨 듯이 하며 마시고는 그 약이 내장에 들어가 외롭지 않도록 박하사탕 한 알 정도 넣어 드리는 지극 정성을 다한다. 사실 복용 수칙을 지켜 적당한 시간에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약발이 떨어져 몸에 약화된 징후가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럴 때면 서둘러 찬밥이라도 물에 말에 위장에 이부자리를 해 두고 부리나케 약을 복용하여 약발을 유지시킨다.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어도 손아귀에서 모래 알갱이가 빠져나가듯이 연약해질 우리의 영적 삶의 건강 유지를 위해 귀한 약을 처방해 주셨다. 그 약명은 하나님의 말씀인‘구약과 신약’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청종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가르치고 지키라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약발로 사는 사람이다. 그 약발이 떨어지면 영적으로 약화된 모습이 다양하게 표출되게 된다. 우리 주님처럼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디딤돌로 유용하게 써져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걸림돌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로 내게서 말씀의 약발이 떨어지지 않게 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임재 하신다.‘약발’이 살아있어야 하나님이 선명히 보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하나님의 원하심을 바로 깨닫게 되고, 그분의 권능과 십자가의 사랑이 내게서 나타내지어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할 수 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예레미야 15:16)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한국인을 대변하는 여러 말이 있지만 기억에 남는 것 중의 하나는‘은근과 끈기’이다. 학창시절에는 이를 함축한 말로‘악바리’라는 말을 종종 사용했던 것 같다. 공부할 때도, 운동할 때도 악바리가 꼭 있었다. 물론 먹을 때는 여럿이 등장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또 하나의 발은‘악발’이다. 나는 이것을 인내하며 부지런함과 열심히 함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하나님께 기도한 바가 응답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께 약속한 바를 온전히 이행할 때까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성취할 때까지 그 어떤 고난과 고초가 따르더라도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하며 곧은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의 행적을 아로 새기는 발이 ‘악발’이다. 부평초처럼 나부끼게 만드는 세대 속에서도 물가에 심기 운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고 더위와 가뭄이 임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원하심의 길을 걷도록 하는 발이 악발 이다. 이 악발은 악한 자의 발과 약한 자의 발을 무색하게 만드는 참 발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11)2.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브리서 12:13)
세 발 그리스도인이 지닌 마지막 발은‘끝 발’이다. 한 인생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이 신앙생활의 출발선이라면, 이 땅의 수한을 마치고 우리 주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은 신앙생활의 결승선이다. 크게는 이렇다지만 그 여정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수많은 출발이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출발의 이름이‘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어버려 흐지부지하게 끝난 경우가 얼마나 많았단 말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작정하고 출발한 것은 분명한데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사나이가 칼을 빼었으면 무를 깎든지 연필을 깎든지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스스로 저버리거나 중도에 쉽게 내려놓아서야 되겠는가? 우리 주님께서“이젠 됐다”고 하실 때까지 끝 발을 유지시켜야 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브리서 3:14)
꼬리 아홉 개 달린 사단 마귀가 살랑 살랑 미혹하고 유혹하는 이 세대 속에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보폭을 맞추어 생명과 승리의 곧은 걸음을 걷게 만드는 나의 발은 몇 개인가? 세발 낙지가 맛있단다. 그런데 세 발 그리스도인은 더 맛깔 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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