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의 사람이 달나라에 간다는 이야기가 먼 꿈나라 이야기였던 시대가 있었다. ‘백 세 시대’또한 이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덧‘백 세 시대’란 말도 꽤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말이 되었고, 그 진앙 거리 중에 하나는 회갑잔치란 말이 사라져감이다. 물론 백세의 장수함이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진정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모든 인생의 공통의 숙원은 아마도 불로장생(不老長生) 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일 것이다. 노화를 더디게 하거나 아예 하지 않음으로써 오래 사는 것 또는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래로부터 사람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런 일련의 노력이 지나쳐서 오히려 생명 단축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도서 3:2)
불로장생을 간절히 원하던 사람으로는 아무래도 진시황(秦始皇:BC 259~BC 210)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겠다고 떠난 사람의 이름은 기록에 따라 다르게 표기하고 있기도 하는 데 서불(徐佛)이라고도 하고, 서복(徐福)이라고도 하며, 서시(徐市)라고도 전하고 있다. 어쨌든 도사 서복이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을 찾아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우리나라였다.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말하는데 그것은 지금 각각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을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헤맨 여정에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불로초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 모두는 다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심에 불과한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사를 들여다보면 불로초가 있을 듯싶기도 하다. 딱 집어서‘무엇이 불로초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불로초가 서식하고 있는 곳은 아마도 그 사람의 마음이 밭이 아니겠는가싶다.
가는 세월도 늙음도 다소간 더디게 느껴지도록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근원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음은 모두가 인지하는 바다. 어느 소책자에 보니“사람이 늙게 되면 첫째, 고집이 세지고, 둘째, 잘 삐치며, 셋째,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사죄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이라 말들을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친구가 없어지고 외톨이가 되면서 금 새 늙어 쭈그렁밤송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육신은 내 마음대로 안 되지만, 정신은 내가 조종할 수 있으며, 육신이 늙어 갈 때 정신이 따라 고집, 삐침, 복수심 등을 버리면 최소한 천수(天壽)를 누리고 동안(童顔)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리라 믿는다.”라고 의미 있는 글이 실려 있다.
세월은 사람에게 나이를 먹이고, 어쩔 수 없이 세월의 줄다리기에 패해 나이를 먹은 사람은 그 만큼 늙어간다. 다만 조금 더 외모 상으로 일찍 늙느냐, 아니면 늦게 늙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마음속에 불로초를 재배하는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항상 젊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생각하고, 무언가 할 일을 찾아 행동하는 화초가 마음의 정원으로 꾸며있는 것 같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잠언 23:7)
불로불사가 인간의 소망이라면,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의 숙명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비결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마음이 몸보다 먼저 늙는 것만 경계해도 훨씬 더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아름답게 늙어가는 아니 잘 익어가는 노인들은 슬그머니 그 비법의 호주머니를 열어준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31)
흔히‘박이후구’(薄耳厚口)라 하여 귀가 얇아져서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입은 두터워져 자기 말만 쏟아내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에 허황한 고집을 부리는‘망집’(妄執)을 풀어 놓으면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언제나 말이 많고 한말을 또 하고 하는 중언부언(衆言浮言)을 삼가야 하며, 백우무행(百憂無行)도 피해야 한다. 즉 백 가지 근심만 할 뿐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걱정이 생기면 몸을 움직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리 하지 않으니 몸이 늙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태자면 고안(故安)이다. 옛 것에 기대어 안주하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하며,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해 열린 마음과 낯선 것들에 대해 관대한 태도, 그리고 끝없는 호기심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의지와 행동이 바로 불로의 비책이란다.
늙어도 도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의 공부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뛰며 생활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젊음을 유지하는 아름다운 늙음의 미학(美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0-31)
다산 정약용 선생은「목민심서」에서 늙음의 미학을 이렇게 풀어 놓았다.“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 없는 작은 것은 보지 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것이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고,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고, 이가 시린 것은, 연한 음식만 먹고 소화불량 없게 하려 함이고,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이며,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 든 사람인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배려다. 정신이 깜박거리는 것은, 살아온 세월을 다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니 지나온 세월을 다 기억하면 아마도 머리가 핑 할 터이니 좋은 기억,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할 터이고, 바람처럼 다가오는 시간을 선물처럼 받아들여, 가끔 힘들면 한숨 한 번 쉬고 하늘을 볼 것이라. 멈추면 보이는 것이 참 많소이다.”
늙음은 결코 부끄럽지 않을 한 인생의 결실이자 훈장이며 완성작을 향한 그림 그리기이다. 어느 화가인들 하나의 대상을 두고 그렇게 오랜 세월 모델을 삼아 붓 터치를 해왔단 말인가! 그러므로 오늘도 늙어가고 있어도 살아 호흡하고 있다면 내 인생 그림은 여전히 신작의 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다.
유명 화랑에 자리매김 된 명화만이 감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생각지도 않은 자리 자리에서 오늘이라는 붓 터치가 아름답고 고결하게 되어 진 어르신들을 만나게 된다. 그 인생 그림은 한 동안 주시하지 않아도 문득 한 순간의 마주침만으로도 내 인생그림에도 채색하고 싶은 물감의 색을 마음에 쥐어준다. 그리고‘나도 저 분처럼 곱게 늙어가야지’라는 말이 마음의 숨구멍을 통해 저절로 새어 나온다.
한 인생을 들여다보며‘닳아짐과 녹슮’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늙음과 낡음’이라는 말로 마디마디에 서려진 인생의 흔적을 요약할 수도 있다. 곱게 늙어 가는 이를 만나면, 세상이 참 고와 보인다. 그 늙음 속에는 낡음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움이 다가선다. 늙음과 낡음이 함께 만나면, 허무와 절망이 남게 되기 쉬우나, 늙어도 낡지 않는다면 삶은 나날이 새롭게 된다. 그래서 몸은 늙어도 마음과 인격은 더욱 새로워져서 더 원숙한 삶이 펼쳐지고 더 깊은 깨우침이 다가오게 된다. 늙은 나이에도 젊은 마음이 있고, 젊은 인격이 있다. 반면에, 젊은 나이에도 낡은 마음이 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편 92:12-14)
늙음과 낡음은 삶의 본질을 갈라놓는다. 글자만 다른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 태어나고 비록 몸은 늙어가겠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새로움으로 살아간다면 평생을 살아도 낡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곱게 늙어 가는 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이다. 그래서 멋모르고 날뛰는 청년의 미숙함 보다는 고운 자태로 거듭 태어나는 노년의 삶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늙어 감을 아쉬워하기 보다는 낡아지지 않도록 마음 씀이 더욱 현명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세는 충분히 늙은 팔 십 세 에 하나님께서 신겨주신 거룩한 신발을 신고, 권능의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었다. 그 사명을 일백 이십 세 까지 잘 감당하고도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함의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낡아지지 아니함으로 곱게 늙어가는 모세를 보고 성장한 갈렙도, 팔십 오 세 된 늙은 나이에 아낙 사람이 있고 크고 견고한 성읍들이 즐비한 헤브론을 기업으로 달라고 요청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게 되었다.
우리 주님은“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8-18)하시며 한시도 사명과 영성의 녹슮과 낡음에 호락호락 촌음을 내어주지 아니했다. 얼마 전에 설립예배를 드리는 한 교회에서 그 교회 담임목사가 설립보고를 하면서“개척 초기에 수개월 동안을 영원한 성도인 아내와 단 둘이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고 말할 때 눈시울이 붉어진 적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이다. 자녀가 어버이보다 더 녹슬거나 낡아져서는 안 되잖겠는가. 더 늙어져서도 안 되고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위해서 일하시고 계시는데, 왜 우리는 작디작은 일을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과 사명에 늙은 티를 내고 있단 말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알게 모르게 거울 앞에 공손히 내 온 몸을 조아려 내 육신이 낡음으로 늙음이 진전되지 않도록 꾸미고 관리한다고 할 때, 과연 나는 나의 영성이 낡아지거나 녹슬지 않도록 얼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사명은 노화제가 아니라, 고기능성 영성 화장품이다. 마음이 늙으면 청년이라도 노년의 삶을 살 수밖에 없고, 반대로 마음이 젊으면 노년이라도 청년의 인생을 거닐게 된다. 그런 분들이 남긴 어록이 있잖는가.“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사명에 깨어있는 사람은 곧 하나님께 깨어있고 마음이 열려진 사람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영과 육의 주름살이 펴지고, 노년의 마음이 퇴치되어 여전히 펌프질 소리 거세게 나는 심장을 품게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님께서 그만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시기까지 젊은 가슴과 자녀 된 도리로 충분히 닳아지고, 충분히 아름답고 성실함으로 늙어져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주님 앞에 녹슬지 않고 낡아지지 아니함으로 복음 열정의 땀 냄새를 가득 품은 채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설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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