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이라는 제목의 코미디를 시청했다. 옷가게 주인이 자장면을 시켰고 다소 늦게 배달되자 배달원에게 화를 내다 못해 사장까지 불러 호통을 치자, 사장과 배달원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러나 옷가게 주인은 죄송하다는 표정이 영 아니라며 트집 잡아 손찌검까지 해대고“옷도 거지같이 입었다”며 갑질 행세를 휘둘렀다. 한바탕 호되게 당하고 돌아가던 자장면집 사장과 배달원은 갑자기 발걸음을 돌려 이 참에 옷을 하나 장면하잔다. 그래서 방금 자장면을 배달 갔다가 갑질의 횡포를 당한 그 옷가게에 들려서“왜 옷에 구멍이났냐”는 둥, “닭싸움하려고 신발을 한 짝만 사려는데 왜 안파냐”는 둥 트집을 대며 이젠 갑이 되어 당한 갑질 횡포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웃픈 내용이었다.
국립국어원이 개통한 국민 참여형 국어사전인 ‘우리말 샘’에 등록된 갑질의 뜻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짓”으로 설명되어 있다. 해외에서도 우리나라의 ‘갑질’을 적당하게 번역할 단어가 없어서 그냥 ‘Gapjil’로 소개되었다는 부끄러운 현실이 매우 가슴 아프다. 우리사회의 갑질 문화는 갑이 을에게 행한 갑질도 가슴 아프지만, 갑의 횡포로 쌓인 감정을 을이 을에게 풀어냄으로 발생하는 아픔이 더욱 크다고 한다. 거기에 내재한 심리는 ‘나는 네 입장이 아니다’‘당신이 겪는 고충은 나와 상관이 없다’라는 공감능력의 결여라고 본다.
요즘 그나마 뉴스에서 한 자리라도 차지했던 갑질 횡포는 땅콩회항, 모 백화점 모녀사건, 백화점의 갑질 여인, 경비원에 대한 갑질 막말 손찌검, 프랜차이즈의 본사 갑질, 군장병의 갑질 논란, 모 유명제약회사 회장의 운전사 막말 갑질 등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의 피 속에는 태생적으로 갑질의 유전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말기의 사회상을 들여다보면 세간에 나도는 갑질의 유사 형태를 볼 수 있다. 사자성어 중에‘아전인수(我田引水)’가 있는데 이는 자기 논에 물 댄다는 뜻으로, 무슨 일을 자기에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이다. 아전인수에서 아전은 마을 관청의 중간 관리급이다. 세금을 매기고 걷는 실무 담당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온갖 갑질이 가능하다. 오랜 가뭄에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져 물 한 방울이 절실할 때 갑자기 아전이 나타나서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댄다 할지라도 힘없는 백성은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갑질을 당한 논바닥은 더욱 깊게 파들어 가고,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 깊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독일의 심리치료사 헬무트 폭스는 그의 저서「좋은 기분을 도둑맞지 않는 법」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인격체로 존중하고 존중받기 위해서는 7가지의 덕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첫째는, 자신을 낮추는 자세이다. 겸손은 우리를 내적인 긴장 없이 한 발 뒤로 물러설 수 있게 해 준다. 겸허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은 자신을 넘어 성장하고 자신이 더 크고 유익한 세계의 가치 있는 한 부분이라는 만족감을 가지게 도와준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자세이다. 다른 사람이 처한 문제나 어려움을 더 먼저 챙기는 마음을 통해 돕는 일의 가치를 경험하게 된다. 셋째는, 배려하는 자세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다른 사람을 사려 깊게 배려할 줄 아는 예의를 갖춘다. 넷째는, 존중하는 자세이다. 타인의 다름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 다섯째는, 환영하는 자세이다. 정성어린 접대는 신성한 미덕이다. 환대의 미덕을 보임으로써 서로 지켜 주고 보호 받는 기분을 누릴 수 있다. 여섯째는, 슬픔을 나누는 자세이다. 동정과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준다. 서로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존중하는 삶은 내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일곱째는,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이다. 다른 사람을 좋게 바라봐주는 마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계속 중요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 세상에는 갑의 자리에 서 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더 크고 넓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라과디아가 판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 어떤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판사는 노인에게“왜 빵을 훔쳐 먹었습니까?”라고 묻자, 노인은 대답하기를“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때부터 아무 것도 눈에 안 보였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판사는 이 대답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런 판결을 내렸습니다.“당신이 빵을 훔친 절도 행위는 벌금 10달러에 해당됩니다.”그렇게 판결이 내려지자 방청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지갑에서 10달러 꺼내며 말했다.“그 벌금은 내가 대신 내겠습니다. 내가 그 벌금을 내는 이유는 그 동안 내가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오늘 이 노인 앞에서 참회하면서 그 벌금을 대신 내도록 하겠습니다.”이어 판사는 방청석을 향해서“이 노인이 밖에 나가서 다시 빵을 훔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뜻이 있으신 분들도 스스로에게 벌금을 내십시요!”라고 하자, 방청객들은 자율적으로 벌금을 냈고, 그 모금액이 무려 47만 달러나 되었다. 이 재판으로 판사는 유명해져서 나중에 뉴욕의 시장까지 역임하게 되었고 훌륭한 덕행을 기념해서 뉴욕에 라과디아 공항이 생겨나기도 했다.
간밤에 감람산에 계셨던 예수님은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오시어 나아온 많은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있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갑질 횡포를 하듯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질질 끌고 와서는 가운데 세우며“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질문을 한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사실 가녀린 여인의 간음 상대자는 숱한 남정네들일 터,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사모함으로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사람들, 심지어 젊은이까지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갑질에 동참을 하여 눈에 핏대를 세우고 정죄의 돌을 들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자, 양심에 가책을 느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다. 어쩌면 갑질의 횡포가 클수록 양심에 화인 맞음이 클 것이고, 갑질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양심의 가책 소리를 가리려는 아우성일게다. 우리 주님은“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할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0,11)고 하시며, 갑질의 돌로 얻어맞아 귀한 목숨을 잃어버릴 뻔 한 여인에게 오히려 은혜와 빛과 소망과 구원의 하늘 섬유로 잘 짜여 진 사랑과 자비의 갑옷을 입혀 주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갑질’을 이렇게 해석해 본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질 좋은 갑옷’이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은혜의 갑옷을 입은 사람은 삶 속에서 절대로 갑질하지 않는다. 그 옷 입고 그렇게 살 리가 만무하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다. 엘가나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자녀가 없어 서러운 판에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나에게는 분깃의 갑절을 주며 여전한 사랑을 나타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슬퍼하는 마음에“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하며 사랑과 위로의 갑옷을 입혀주었다.
성경에는‘질 좋은 갑옷’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가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님이 엘리야를 통해 하신 역사가 갑절이나 있게 해 달라고 구했고 그에게 갑절의 능력의 옷이 입혀졌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왕하 2:9)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여 갑질 풍조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빛의 갑옷을 입고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단도리 하신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각자에게 섬섬옥수(纖纖玉手) 손길처럼 섬세하고 따뜻하게 질 좋은 갑옷을 입혀 주셨다. 그러므로 그 옷 입고 말로 갑질하지 말자. 손으로도 갑질하지 말자. 행동으로도 갑질하지 말자. 그냥 빛의 갑옷을 입고 낮에나 밤에나 빛 가운데 살자. 그러다가 마음 추운 사람 만나게 되면 주저하지 말고 그의 어깨 위에 질 좋은 갑옷 벗어 드리워주자. 그래서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서 있을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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