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두 언덕을 넘게 되면 가을이라 이름 하는 계절이 온 세상의 색깔을 가득 끌어안은 채 펼쳐진다. 그리고 이 때가 되면 한 눈 파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다.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한 눈을 파는 까닭에 누구누구를 탓할 수만은 없다. 천만 다행인 것은 한 눈만 팔아서이지 두 눈 다 팔았으면 어찌했을까? 산에도 들에도 어느 구석진 담장 위에도 좁다란 산길에도 한 눈 팔게 만드는 색감으로 가득하다. 분명 황색, 갈색으로 채색한 예쁨도 뚝뚝 떨어지고 있으련만 시인의 연필에서는“붉은 물이 듣는 듯하다”고 그려지고, 사람들은 이를‘단풍’(丹楓)이라고 단정함에 못내 아쉬움을 느끼는 나뭇잎도 있을 것이다.
이 계절이 되면 새 지도가 그려진다. 제작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한 김사형도 아니고,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도 아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땅에 낮과 밤 그리고 연초록의 봄 붓 터치와 여름의 열정적이고 강렬한 붓 터치를 통해 친히 채색하신 작품이다. 제작된 단풍지도는 순회 전시회를 갖는다. 10월 중순에 설악산 일원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하고는 남녘으로 내려오며 11월 중순까지 잇대어진다. 이 지도 전시회는 발품을 통해 감성 값을 지불하게 되면 얼마든지 색다른 지도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북풍한설 속에서 몸 간수를 잘하다가 동면에서 깨어난 나무는 아직 생명 부지하고 있음을 움틈으로 나타낸다. 싹이 나고 아가의 뽀송뽀송한 볼 딱지처럼 연초록의 얼굴을 내민 새싹들은 하루가 다르게 나무마다의 고유한 문양을 뽐내며 잎 몸의 영역을 채운다. 나무의 원줄기와 잎의 탯줄과도 같은 잎자루를 통해 든든한 발판을 구축한 나뭇잎은 잎맥을 통해 뿌리로부터 공수해준 수분과 영양분을 동맥과 정맥과 모세혈관을 통해 온 잎 몸에 넓고 잘게 나누어 준다.
여름을 지나는 나무는 거룩한 가을날의 향연을 위해 마음 준비를 한다. 얼마 후면 떠나보내야 할 나뭇잎을 위해 그렇게도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땅 속 여기 저기에 뿌리를 파송하여 숨겨져 있는 수분이란 수분은 죄다 빨대 꽂아 잎의 청청함을 유지하게 만들어 준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8)
가을이 되면 어버이 나무는 탯줄과도 같은 잎자루로 착엽한 자녀 잎에 연지 곤지 예쁘게 단장시켜 머지않아 낙엽이 되어 땅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떠나보낼 준비를 하게 된다. 잎의 자루와 가지가 붙어있는 부분에 이층(離層)인‘털켜’라는 특별한 조직을 생성시킴으로 말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떨켜는 식물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도 하지만 미생물이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게 되며 영양분이 원활하게 공급됨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떨켜가 생겨 헤어질 준비가 되면 잎은 물을 공급받지 못하지만 광합성은 계속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초록색을 내는 엽록소가 파괴되고, 엽록소보다 분해 속도가 느린 여러 종류의 색소들이 표면에 드러나며 붉게, 노랗게, 또는 갈색으로 물들게 된다. 결국 나무에 단풍이 드는 이유는 나뭇잎이 초록으로 보이게 하는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그간 보이지 않던 색소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풍은 낙엽이 지는 나무들이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고, 좀 더 고상하게 말하면 겨울 산을 넘어 봄 동산을 맞이했을 때, 새 싹을 움 트이기 위한 선행 작업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거룩한 그네들의 작업을 단풍놀이라는 이름으로 탐닉하며 값싸게 단풍지도를 관람하고 있는 셈이다.
나무가 떨켜를 생성함으로 마음을 다 잡고 잎을 떼어내어 분가를 시키며, 또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되어 자자손손을 이룰 꿈을 꾸면서도 단풍에 그토록 애써왔던 자신의 몸을 가리며 오로지 단풍의 미색을 돋보이는 데에만 마음을 썼던 것처럼, 그 옛날 조선 왕조에 세종과 더불어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긴 임금으로 일컬어지는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7~1800) 임금도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며 편한 마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조 6년 영의정 서명선(徐命善)과의 대화에서“일찍이 듣건대 단풍이 풍년을 예측한다”고 말하며, 단풍놀이보다는 단풍의 정도를 보며 백성들의 농사에 대해 걱정했고, 그 때가 1782년 9월 29일이었으니 양력으로 셈하면 요 서너 주간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대부분의 나무가 떨켜를 통해 새 생명을 기약하는 이별의 눈물 빛깔을 단풍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모든 나무들에게 떨켜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밤나무나 떡갈나무에게‘떨켜를 아느냐’고 감성으로 물었더니, 단풍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본래 이들 식물은 더운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떨켜를 만들어 낙엽을 떨어뜨려야만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이들 식물은 겨울이 되어 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바싹 마르더라도 가지에 붙어 있다가 겨울의 강풍에 어쩔 수 없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오 헨리의『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담쟁이덩굴도 잎에 떨켜를 만들지 않는 식물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가득 채워주고, 예쁜 책갈피가 되어 글 읽는 눈에게 잠시 쉼을 주는 그 귀한 예쁘고 고운 단풍은, 어쩌면 떨켜 때문에 나무와 줄기와의 단절이 되어 처절한 아픔의 몸부림을 하게 된 흔적이 아닐까?
세상의 엽록소 머금고 푸른 잎이 다 인양 자긍하며 죄악 가운데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어 질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모든 인생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날의 잔치를 준비하셨다. 바로 사랑하는 외 아드님이신 예수님을‘십자가 떨켜’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잠시 단절을 만드셨다. 그리하여 아들의 타는 목마름의 처절한 외침이 아버지의 마음자리에 닿지 않게 만드셨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그렇게 또 그렇게 우리 주님은 십자가 떨켜 위에서 오로지 보혈로만 채색된 단풍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 떨켜 위에서 세상의 엽록소를 완전히 차단하고 파괴하시어 우리 안에서 아름답고 고결하고 생명 가득한 의의 색소를 발산하게 만들어 주셨다. 또한 모든 인생들이 충분히 섭취하고도 남음이 있을 생명의 자양분이 되시기 위해 그 고귀한 생명을 낙엽과도 같이 땅에 떨어뜨리셨다. 그리하여 그 하늘의 낙엽을 영혼의 자양분으로 먹는 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얻게 만들어 주셨다.
지도 관람자들이 집중적으로 사진을 찍는 자리의 단풍이 더 붉은 것은 떨켜로 몸에서 분리된 아픔보다도 그 아픔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 때문에 애간장 녹아서가 아닐까싶다. 단풍의 마음을 앎에서 더 달음질하여 낙엽이 동토의 땅에서 겨우내 벌이는 땀 흠뻑 젖은 사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곱게 물든 단풍보다도 더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리라. 단풍은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선사하는데, 왜 우리 인간은 각각의 다름만 말하고 있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단풍지도를 관람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이렇게도 초라해 보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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