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보 라는 시인을 참 좋아한다. 우연히 서점에서 시집을 한 권 들고 멋짐을 자아내는 나 나름대로 세운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집어든 시집이 임보의 시집이었고, 그 분의 시집인「자운영 꽃밭」,「아내의 전성시대」,「장닭 설법」이 연이어 손에 들려 마음에 정겹고 따뜻함으로 담겨져 있다.
시인 임보의 시 중에는 「거울 없는 나라」라는 제목의 필설(筆舌)이 있다.
거울이 없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남의 얼굴을 보고 내 얼굴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 나라에서는
언청이도 남이 미인이라 하면 미인으로 알고
미인도 남이 점박이라 하면 점박이가 된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다. - 임보 -
거울이 없는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 마디로 그들 나름대로 잘 살았을 것이다. 적어도‘누워서 침 뱉는 일’은 안했을지 싶다. 상대방이 나의 얼굴이 된 까닭에 어느 누구도 시비를 하거나 탓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더 덧보이려고 꾸미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를 감추기 위해서 분장하는데 마음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거울은 나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보여준다. 거울은‘거꾸로’라는 뜻을 나타내는‘거구루’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냇가나 개울가에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아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그때 얼굴이 좌우가 바뀌어 보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비춰보는 것을‘거구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거구루’가‘거우루’로,‘거우루’가 오늘날 거울로 변하여 얼굴 같은 것을 비춰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거울에 대한 역사를 들춰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놋쇠를 반짝일 정도로 연마하여 거울로 사용했으며, 기원전 300년경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는 거울의 광학적 원리들을 알아냈고, 이 원리들은 기원전 3세기 말 아르키메데스가 자신의 고향인 시칠리아를 공격하는 로마 함대에 대항하는 데 적용 했다고 한다. 그는 광택 나게 연마한 금속제 거울로 태양 광선을 집중시켜 로마 배들을 불태우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거울은 로마 시대에 와서야 보편화 되었고, 중세에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졌으며, 이 때는 광을 낸 청동거울을 쓰기도 했지만 보통은 은으로 만들었으며 단순한 볼록 원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출애굽 시대에 이러한 거울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성경은 전해주고 있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출 38:8)
거울의 보편적인 용도는 물체의 모양이나 형상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유리 따위로 만든 것을 일컫지만, 때때로 어떤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보여 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나,‘모범(模範)’이나‘본(本)보기’를 비유적으로 이를 때도 “거울이 되어”라고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어느 날 임금이 시골마을을 지날 즈음에 날이 어두워져 하는 수 없이 한적한 목동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목동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욕심이 없고 성실하고 평안한 모습이 평소의 신하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젊은 목동의 모습에 끌린 임금은 목동을 나라의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능력보다도 마음이 더 중요함을 거듭 거듭 느껴왔기 때문이다. 재상이 된 목동은 성실하게 사심 없이 일을 잘 처리해 나갔다. 그런데도 다른 신하들은 그를 시기하였다. 일개 목동이 재상이 된 것도 그러하거니와, 적당히 뇌물도 받고 눈감아주면 좋으련만 모든 일을 공정하고 깨끗하게 처리하니 자신들의 처지가 곤란했던 것이다. 신하들은 재상이 된 목동을 쫓아내기 위해 모함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재상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자기가 살던 시골집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몰래 따라가 보니 광에 커다란 항아리를 두고 그 안을 한 참 동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임금께 그 사실을 알렸다.“재상이 청렴한 척하면서 아무도 몰래 항아리 속에다 금은보화를 채우고 있다”고 말이다. 말은 안 들은 만 못하여 임금은 재상을 앞세우고 신하들과 함께 재상의 집을 찾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광속에 있는 항아리를 열게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항아리 속에 들어있었던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재상이 목동 시절에 입었던 낡은 옷 한 벌과 지팡이뿐이었다. 임금이 사연을 묻자 재상은“저는 본래 목동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은혜로 재상이 되었지만 제가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이따금씩 사가에 와서 제가 이전에 은혜를 입기 전에 입었던 옷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 잡았습니다.”재상에게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진귀한 보물로서의 거울이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가장 바르고 아름답게 비취어 단장해 주는 거울말이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백성 이스라엘을 징치하기 위한 일시적인 인생채찍으로 사용한 바벨론의 손아귀에 이끌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벨론 나라의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을 거쳐 메대의 다리오 왕까지 여러 왕조를 거쳐 왔지만 하나님의 남다른 사랑 속에서 이국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들도 남다른 거울을 소지하고 있었다. 다리오 왕이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방 사람 다니엘이었다. 토종 총리들과 신하들은 그렇잖아도 눈엣 가시인데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 바르게 직무를 보고하고,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함으로 더욱 총애를 받게 되자 그들은 날로 맹독을 만들어 품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가재미눈으로 지켜보니 다니엘이 업무 시간 짬짬이 사가에 들르는 것이 아닌가. 다니엘은 거울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하로서의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기 위해서 거울을 보러 갔는데, 맹독을 품은 신하들의 눈엔 그것이 큰 트집거리 재료로 보였던 것이다. 홍자성의「채근담」에 보면“이슬을 소가 먹으면 젖이 되고,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된다”하지 않았던가.
다니엘의 거울은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었다. 그 거울은 사자 굴도, 풀무불도 보이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과 나만을 바르게 보여주는 진실한 거울이었다. 결국 그 거울은 다리오 왕의 마음에까지도 빛을 비추어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단 6:26-27)
거울은 엄밀히 말해서 잘 보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의 시야의 폭을 온 세상에서 나에게로 축소시켰다. 거울의 원재료인 유리는 온 세상을 그대로 투사해 주었지만, 그 맑은 유리에 은과 같은 재료를 얇게 도금하거나, 알루미늄을 증기로 만들어 유리면에 증착시키게 되는 순간 나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것도 나의 속사람까지는 엄두도 못 내고 겉모습만 보게 하고, 나와 많이 다른 모습을 치장하는데 악용되기도 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약 1:23)
거울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시인 노천명은 그의 시「사슴」에서 우리의 일생에 젖어드는 시어를 이렇게 풀어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 본다. - 노천명 -
우리는 거울을 볼 때마다 어떤 전설을 떠올리는가.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복음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잃어버린 전설인가. 기쁜 믿음의 추억인가 슬픈 추억인가 말이다.
유태인 제자 한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와 묻기를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서로 도우며 살려고 노력하는데, 저는 왜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요?”랍비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창밖을 내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엄마가 자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차 한 대가 한가롭게 달려가고 있군요.”“그렇다면 이번에는 벽에 걸린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제 모습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그러자 랍비는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제자에게 말했습니다.“창이나 거울 모두 유리로 만들어졌지만 유리에 칠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지.”이제 제자는 거울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반사된 세상을 보는 걸음을 떼게 되었다.
우리는 일생의 꽤 많은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낸다. 자주 들여다본다. 그 앞에서 별 요상한 표정도 지어 보이고, 입 속까지도 들춰 보인다. 내 마음의 사계절을 표정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거울은“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에 대한 질문에 화장도 해주고, 분장도 해주고, 환장도 해 주어 나를 착각의 늪에 가둔다.
이제 내 유리의 표면에 입혀진 은도금, 알루미늄 도금을 긁어내자. 아니 완전히 벗겨내자. 그리고 또 다른 도금을 하자. 나만 바라보게 만들었던 도금이 아니라, 옛 전설에 취하게 만드는 도금이 아니라, 땅의 것만 바라보고 슬퍼하게 만드는 도금이 아니라, 맑고 선명한 소망이 아려지고, 주님의 보혈로 채색된 붉은 사랑으로 알록졌으며, 주님의 눈과 마음이 집중된 그 곳만이 투사되어 보이도록 해 주는 도금을 하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힌 도금!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진하게 칠해진 도금! 성령님의 권능으로 덧입혀져 영원히 깨지지 않게 제작된 거울을 갖자. 그 손거울을 안 주머니에도, 뒤 호주머니에도 항상 꽂고 다녀 그리스도인다운 폼 한 번 제대로 내 보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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