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마다 결혼기념일이 되면 나는 아내에게 빨간 장미를 한 송이씩 더 해서 꽃다발을 품에 안겨준다. 장미를 선물함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빨간 장미 한 송이는‘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이고, 분홍 장미 한 송이는‘당신은 묘한 매력을 지녔군요.’하얀 장미 한 송이는‘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노란 장미 한 송이는‘혹시나 했는데 역시 꽝이야’이며, 빨간 장미 44송이는‘사랑하고 또 사랑해요.’하얀 장미 100송이는‘그만 싸우자. 백기 들고 항복이야.’노란 장미 24송이는‘제발 내 눈앞에서 이사 가줘’빨간 장미 119송이는‘나의 불타는 가슴에 물을 뿌려주세요.’노란 장미 4송이는‘배반은 배반을 낳는 법!’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다.
내가 아내에게 빨간 장미를 선물하는 것은 그 꽃에 담겨진 꽃말이‘기쁨’과‘아름다움’이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그냥 아내가 빨간 장미꽃을 닮았고, 그 속에는 지난 일 년 동안 아내의 인생에 더 큰 기쁨을 담아주지 못한 옆구리의 미안한 마음 또한 몇 송이에 숨겨져 있다. 그런데 그냥 장미꽃만이 아니라 안개꽃을 장미의 꽃받침으로 해서 선물한다. 안개꽃인 나로 인해 빨간 장미가 더 아름답게 돋보이고 기쁨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무식한 사랑에 인연하여 장미의 한자어를‘長美’라고 붙이며 그 아름다움이 길게 가기를 소원한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3)
장미는 꽃의 여왕이라고들 말 하지만 다른 꽃들이 없으면 결코 여왕이 될 수 없다. 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지만 다른 꽃들이 모두 장미를 닮았다면‘가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사실 홀로 아름다운 것도 없고 홀로 추한 것도 없다. 그러기에 존재의 상관관계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된다. 남이 있기에 내가 있다면 내가 누리는 행복 또한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넝쿨장미가 누군가의 울타리에 드러누워 고급 향취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장미꽃 미소를 머금게 한다. 장미도 뼈대 있는 가문이란다. 원래는 하이브리드티, 플로리번다, 글랜디플로라, 클라이밍 네 가지 계통이 있어 향료나 약용으로 재배되어 오다가 중세 이후에 관상용으로 개량되어 원예종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한다. 장미는 1867년이 분기점이 되어 이전의 장미를‘고전장미(old garden rose)’라 부르고, 교잡종이 탄생한 이후의 장미를‘현대장미(modern garden rose)로 구분하여 분류하는데, 대략 그 종류는 이만 오천 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아마도 장미를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영국이지 싶다. 그 나라의 국화(國花)가 장미이기 때문이다. 장미가 영국의 국화로 자리매김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장미 꽃잎이 짓이겨 밟힌 매우 아픈 역사가 있다. 바로 장미전쟁이다. 장미전쟁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년 동안 벌어진 영국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 전쟁이다. 당시 10만 명 이상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치열했던 이 전쟁에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흰 장미를 문장으로 내세우고 싸운 때문이었다. 이 전쟁은 결국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7세가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맞아 튜더 왕조를 만들면서 끝이 났다. 이때 화합의 징표로 붉은 장미와 백장미를 합쳐서‘튜더 장미’를 만들어 그의 왕기로 사용함으로서 영국은 튜더 장미로 통일이 되었다. 즉, 양 가문의 장미 문양을 합성하여 바깥쪽 잎의 색은 빨간색, 안쪽의 잎은 흰색의 장미로 만들어 포용의 정신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영국 왕실의 문장과 국화로 되어 있다. 튜더 장미는 통일과 평화를 의미하는 장미가 되었다.
지금도 섣불리 아름다운 장미를 가까이 하려다가는 현대판 장미전쟁을 치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장미와 도저히 한 몸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가시에 대해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어느 날 큐피드가 장미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키스를 하려는 순간 벌이 나와 큐피드의 입술을 쏘아 버렸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큐피드의 어머니인 비너스는 많은 벌들의 침을 장미 줄기에 붙여 버렸는데, 이것이 장미 가시로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멋모르고 장미를 맴도는 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거나.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28:24)
어찌 보면 장미의 가시는 미운 오리새끼 그 이상이다. 사람들은 장미의 가시를 마치 천덕꾸러기 취급하듯이‘가시 돋친 장미’라고 많이들 표현한다. 이러한 생각은 장미도 매 한가지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장미가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질문을 던졌다.“하나님! 예쁜 나에게 왜 가시를 주셨습니까?”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너에게 가시를 준 것이 아니라, 가시에게 너를 준 것이다.”
장미와 가시는 극과 극을 오가듯이 서로 상반되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 그러나 여전히 같이 살고 있는 것을 어찌하랴. 그래서 무언가가 있겠지 싶어 깊이 관조(觀照)해 보면 놀라운 결합임을 금 새 발견하게 된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의 자태를 가시가 방패막이가 되어 지켜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장미를 함부로 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눈에 띄지 아니하는 가시라는 보호막에 의해 장미의 아름다움이 돋보이고 고매한 자태가 지켜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험준한 가시밭길 같은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성숙해지고 장미꽃같이 아름답고 화려한 삶이 되는 것이다. 올림픽이나, 국제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각 종목마다 아프리카 선수들이 금메달을 거의 다 차지한다. 그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맨발로 산과 가시밭길을 걷고 광야를 달렸던 그 발이 강하게 되어서, 아스팔트 평지와 잔디밭 길로 편하게만 다녔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단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인생이 가시로 여기는 것은 실로 다양하겠지만 대략 그 가시의 이름은 고통, 실직, 눈물, 울분, 실패, 고독, 한 맺힘, 한숨 그리고 죽음 등으로 돌출되어 가슴을 찌른다. 그래서 어느 현자는“인생은 고해와 같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응당 내 인생은 장미꽃을 뿌려 놓은 탄탄대로로만 생각하며 당연한 삶으로 여기다가 갑작스럽게 이런 저런 가시가 돌출되게 되면‘왜 나의 장밋빛 인생에 가시가 생겨났냐’며 그것을 수용하지 못해서 더욱 깊게 찔리는 아픔을 겪곤 한다. 그것은 ‘가시 돋친 장미’에 눈과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생각을 달리해 보자. 우리의 인생은‘가시 돋친 장미’가 아니라‘장미 담은 가시’가 아닌가 말이다. 투박하고 거칠고 모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미보다도 어여쁜 생명의 꽃을 피우고, 성령님의 충만하게 하심의 은혜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간혹 나의 인생에 돌출되는 가시는 찌르는 가시로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아니함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그 은혜로 꽃 피워진 장미를 잘 지키도록 해 주는 금 방패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나 되게 만드는 가시라는 말이다. 장미 인생에 쓸모없는 가시가 생겨나는 인생이 아니라, 가시 인생에 하나님께서 어여쁜 장미를 꽃 피우도록 축복하신 인생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의 인생을‘가시 돋친 장미’가 아니라‘장미 담은 가시’로 재인식하게 될 때 가시마져도 장미꽃 이상으로 소중하게 다가서게 될 것이고, 그런 향긋한 믿음을 자아내며 감사함으로 살게 될 때 하나님은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더욱 확산시켜 주시고, 기쁨의 영역을 확장시켜 우리 주님 안에서 장미꽃을 뿌려 놓은 것 같은 평안의 탄탄대로를 걷게 해 주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신학교에 다니던 때에 한 권의 시집이라도 들고 다녀야 제법 폼 나는 대학생이 될 것 같아 손에 쥐었었던 이해인 님의‘민들레 영토’시집에 수록된‘장미의 기도’를 되새겨 본다.
피게 하소서
주여
당신이 주신 땅에
가시덤불 헤치며
피 흘리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태양과 바람
흙과 빗줄기에
고마움 새롭히며
피어나게 하소서
내 뾰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 되지 않게 하시며
나를 위한 고뇌 속에
성숙하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주여
당신 한 분
믿고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마음 가다듬는
슬기를
깨우치게 하소서
진정
살아 있는 동안은
피 흘리게 하소서
죽어서 다시 피는
목숨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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