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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라는 마중물
임현희 2016-05-26 추천 5 댓글 0 조회 1675

, 퇴근 시간대의 엘리베이터 안은 유동 주민들이 많아 서로 밀착할 수밖에 없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어정쩡한 자세로 숨 쉬는 소리조차도 내지 못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소리 없이 방귀 냄새라도 살포하는 날이면 여간 난감하지가 않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방포인이 아님을 표현하기 위해 코를 킁킁 거리기도 하고, 숨을 길게 내 뱉기도 하며, 괜히 천정을 바라보며 눈을 감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혹신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하고 생각하며 괜스레 얼굴이 빨개지곤 한다. 허리 아래로는 방귀의 가스가 모락모락 위로 솟구치며 엉겁결에 화생방 훈련을 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씩 허리 위에서는 앞 사람의 뒤통수에다 대고 하는트림때문에 뒤 돌아볼 수도 없고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출근 시간에 쫓겨 정신없게 마시듯이 음식을 들이키고 챙겨서 나오다 보니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할 트림 나팔 소리가 앞 사람의 귓가에 대고 완급조절 없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방귀나 트림의 공격을 받은 적도 많겠지만 우리도 알게 모르게 공격했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완급조절을 할 수 없는 한 이유는 둘 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기 때문이다. 트림이 발생하는 경로는 보통 위에서부터 발생하는데, 우리가 음식을 삼킬 때 자연스럽게 유입되는 공기나 가스 등을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밖으로 배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방귀나 트림이라는 생리작용이 문제가 아니라 밖으로 배출된 가스로 인해서 야기되는 불쾌감이 더 문제일 것이다.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3)

 

   소싯적에 블레셋 장수 골리앗에게서나 나올 법한 아주 큰 트림 소리를 종종 듣곤 했었다. 수도라는 상수도 시설의 문명을 접하기 이전에 우물가에서 말이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던 것에서 조금 발전해서 만들어진 것이 펌프였다. 우물 저 바닥 깊숙이까지 관이 연결되어 있어 펌프질을 계속 하다보면 패킹(packing)에 의해 물이 끌어 올려 져 시원한 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적정시간이 지나면 패킹과 관의 미세한 틈을 통해 공기가 유입되어 펌프의 턱 밑까지 차올랐던 물이 관 바닥까지 쭉 내려가게 된다. 그 때 나는 소리가 마치 사람이 트림을 하듯이끄윽하고 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펌프를 이용하는 사람은 필요한 만큼의 물을 긷고 난 다음에 꼭 물 한바가지 정도를 펌프 곁에 떠 놓고 그곳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 펌프질을 하여 물을 얻을 사람이 트림하며 주저앉은 물을 다시 끌어 올리는 패킹의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 한 바가지의 물을마중물이라고 한다. 아마 경제적인 단어로 치환한다면종자돈’(seed money)에 해당하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종자돈이 거액의 자금을 형성하는 씨앗이 되듯이, 마중물 한 바가지가 끝없이 샘물을 뿜어 올리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13:19)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이 마중 나가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마중 나가는 모양새는 실로 다양할 게다. 그 마중물의 이름 중에는이해’(理解)도 있고,‘오해’(誤解)도 있다. 남의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잘 헤아려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이해라면,‘오해는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것을 일컫는다.

 

   속담 중에배나무 밑에서 갓 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해를 마중물로 사용했다면선비가 갓을 쓰고서 낮은 배나무 밑을 지나느라고 여간 곤혹스럽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터이지만, 오해를 마중물로 사용했다면아니 저런, 양반이 체통머리 없이 남의 집 배를 따고 있다며 혀를 끌끌 차게 될 것이다.

 

   시골에서 목회하는 선배 목사님 부부를 불러 식사를 대접하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해와 오해를 넘나드는 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리 많지 않은 성도들 대부분이 농사를 하는 까닭에 소출하는 시기에는 다양한 채소 작물을 섬기는 마음으로 가져다 주셔서 채소류가 주방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드시는 양도 한계가 있고 냉장고도 그리 크지 않아 신선하게 보관하기도 용이하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먹을 만큼만 남겨 두고 농사를 짓지 않는 교인이나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교회에 흉흉한 소문이 돌더란다.“사모님이 얼마나 좋은 것 먹고 살기에 우리가 가져다 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다 준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은 이제 그 모든 채소 선물을 소화할 양으로 지져 먹고, 볶아 먹고, 튀겨 먹고, 날로 먹고, 익혀 먹고, 말려 먹고 했는데도 다 드시지 못하고 때가 지나니 썩어서 일부를 내다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버린 채소가 매의 눈을 가진 성도에게 목격이 되어 이번에는 또 다른 흉흉한 소문이 돌았단다.“사모님이 우리가 가져다 준 채소를 하찮게 여겨 구석에다 쳐 박아 두었다가 썩게 되어 내다 버렸다는 소문이었다.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그 자리를 오해가 꽤 차게 되고 그 오해는 얼마나 무서움으로 해악을 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이해가 필요할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당장 눈에 나타나는 모습만 가지고 순간에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별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이드리스 샤흐는사람들은 자기 수준에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마음 넓혀 이해하려고 작정하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덮어지지만, 마음 좁혀 오해하기로 작정하면 모든 것이 다 마음 불편한 것이 우리 삶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시각이 이해의 관점을 마중물로 사용한다면, 한 없이 관대하고 넓어질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고 자꾸 그 결점만을 보고 마음을 편케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또한 한 없이 불편하고 자신도 주변 사람도 힘들 것이다. 이해는 우리의 삶을 무한히 행복하게 할 것이며, 오해는 우리의 삶을 끝없이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누구나 오해의 문턱에서 서성거릴 수는 있다. 그러나 문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 끝은 사망의 늪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괴테는 말하기를오해는 뜨개질하는 양말의 한 코를 빠뜨린 것과 같아서, 시초에 고치면 단지 한 바늘로 해결된다.”라고 했다. 오해의 걸음을 시초에 단절시켜야 나도 살고 너도 살게 된다는 말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성경에도 오해와 이해의 한 단면을 넘나든 이야기가 나온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사는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나,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남편은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며 그대가 열 아들보다 낫다며 사랑을 주었지만,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힘 앞에 남편의 위로와 사랑은 역부족이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을 품고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고 서원까지 했다.“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고 말이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서러움과 고통을 끌어안고 기도하다 보니 아주 오래도록 입술만 동하며 음성을 들레지 아니하고 가슴으로 읊조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 때,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던 제사장 엘리가 한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취한 줄로 생각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너무 괴로워서 낮술에 취해 성전에 와서 웅얼거리는 것으로 오해를 했단 말이다. 그래서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호통을 친다.

 

   오해는 아픈 데만을 골라 치는 얄미운 권투 선수와 같다. 나름대로 아픈 것을 해소해 보려는 시도조차 짓눌러 버리게 되고,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으로 내 던지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도하는 중에 오해의 공격을 받은 한나는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삼상 1:15-16)라고 조곤조곤히 엘리 제사장을 이해시켰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잠잠히 기도했고, 엘리 제사장에게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자신의 형편을 말하게 되자, 엘리 제사장의 생각에 들어있던 오해는 금방 이해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니, 한나는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가서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오해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복을 비는 엘리 제사장과, 그것을 믿음으로 수용하고 뒤 끝 없이 하나님의 은혜 주시는 날을 사모하며 근심 빛 없이 살아가는 한나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오해된 순간보다 그 오해로 말미암아 생겨난 주변정리에 대한 후속조치 미흡으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까지 아픔을 겪고 오해의 여운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해는 나의 생각 속에 두 번째로 다가오는 해석이며, 오해는 다섯 번째로 달려드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빨리 이해를 내 마음에 붙들어 매어야 한다.‘이해한다는 영어로 understand 의 합성어이다. 즉 상대방의 아래에 서있는 자세가 이해라는 말이다.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의견과 상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넓게 열고 시야를 활짝 펼쳐 낮은 자세로 경청하게 되면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해는 하늘의 보화를 높이 쌓는 모습이 되지만, 오해는 죽음의 골짜기를 깊이 파는 모습이다.

 

   어느 글에 보니 이해와 오해를 이렇게 해석해 놓기도 했다. 5-3=2인데, 이것은 오해하다가 세 발자국만 물러서서 보게 되면 금방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고, 2+2=4인데, 이것은 이해하고 또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참으로 멋진 공식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해해주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을 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할 일이다. 그러나 오해가 주특기인 사람 앞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물귀신 작전에 휘말리기 싶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기도하며 말씀의 이한 검을 장착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마중물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해라는 마중물 말이다

그 이해의 마중물은 한 사람의 심연(深淵)에 잠재되어 있는 소중한 것을 끄집어내어 발산하도록 돕는 여름날의 냉수보다 소중한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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