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전부터 왕과 신하들은 무료한 시간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문제를 내고 풀면서 재미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문제를 맞춘 사람은 일정한 수만큼 할당받은 화살을 투호 속에 집어넣었는데 화살이 투호 속에 모두 들어간 사람이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 놀이가 민간에 전해지면서 화살 대신 수숫대를 사용했고, 수숫대를 함지나 절구통에 담는다 하여‘수수께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번갈아 가며 수수께끼를 내다보면 점점 황당하기도 하고 다소는 억지스러운 문제까지 출제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우리의 삶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수수께끼는 지적 재미, 웃음의 유발, 시대적 상황의 반영, 상대방과의 친밀감 형성, 그리고 대화의 지속성을 가져와서 관계와 소통을 창출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수께끼가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라는 책무를 감당하고 있다 할 때, 총선(總選)을 앞 둔 상황이어서 그런지 근자에 총선과 관계가 됨 직한 수수께끼를 두 개 접수했다. 하나는“도둑고양이와 국회회원들이 좋아하는 금은?”이었고, 다른 하나는“서울 시민이 한 마디씩 하면 무엇이 되게?”였다. 답은“야금 야금”과“천만의 말씀”이란다. 말이 되는 지 안 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황당하고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라도 주고받으며 웃다보면 코드가 맞는다 하며 소통하게 되고 하이파이브(High Five)도 하며 서로를 마음에 담게 된다.
우리는‘담는다’라고 할 때 가장 먼저 그릇 또는 용기가 마음에 그려진다. 이 그릇에‘담음’은 양면성을 지닌다. 나름대로의 무엇을 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짐으로 그릇 이름이 정해지기도 하지만, 그 무엇을 담았기 때문에 그릇 이름이 명명되기도 한다.
같은‘병’(甁)이라 할지라도 물을 담으면‘물병’이 되고, 꽃을 담으면‘꽃병’이 되며, 꿀을 담으면‘꿀 병’이 된다.‘꿀단지’라고 우기면 하는 수 없겠지만 말이다. 또한‘통’(桶)에 물을 담으면‘물통’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쓰레기 통’이 된다. 그릇에 밥을 담으면‘밥 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국 그릇’이 되며, 김치를 담으면‘김치 그릇’이 된다. 한 마디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그릇의 가치와 척도가 달라진 다는 것이다.
무심코 거리를 지나다 보면 사계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디자인과 색상의 옷을 입고 묵묵히 서 있는 우체통을 발견하게 된다. 지난 시절에 설렘과 제법 진지함을 갖고 다가서게 만들었던 우체통이었건만 지금은 온라인 이메일과 모바일상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가 발달하면서 조금은 느리지만 소중한 소식을 전달하던 수단이 되었던‘빨간 우체통’이 점차 추억 속으로 자취를 감추면서 하나 둘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가고 있다.
항상 빨간 우체통을 배부르게 만들었던 손 편지 한 통에는 누군가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담아 있었고, 우체통이 받아먹은 음식 중에는 누군가의 수줍은 사랑고백이 깨알같이 담겨진 러브 레터도 있었고, 군대 간 아들이 보내온“부모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온 가족을 한 자리로 모이게 하고 눈물을 훔치게 만들었던 편지도 있었으며, 타지에 나가있는 자식의 안부를 접하여 수도 없이 읽으며 가슴에 보듬었던 따뜻한 편지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 온종일 10통 미만의 편지를 섭취하여 시대의 감성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어왔던 빨간 우체통은, 우체국 구석진 창고라는 고아원에 버려져 시대의 눈길에서 외면되어 가고 있다.
그나마 빨간색 상의와 초록색 하의를 입고 자태를 뽐내던 시절에서 유행에 따라 빨간색 옷으로 갈아입고 꽤 오랜 세월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왔던 거리에 남겨진 ‘빨간 우체통’이, 때 아닌 배부름을 가진다고 하는 데 그 음식은 우편물이 아니라 쓰레기라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우편물을 담는 통이기에‘우체통’이라 불리어지고 있었는데,‘슬그머니 버린 휴지, 슬그머니 버린 양심’이라는 표어를 한 번도 새겨보지 못함직한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 그 예쁜‘빨간 우체통’이 졸지에‘빨간 쓰레기통’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까마득한 기억이지만, 사계절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금방이라도 터져 쏟아질 만큼 많은 우편물과 소포를 가죽 가방에 담아 자전거에 싣고 집집마다 전달했던 우체부는 그날의 소임을 다하고 우체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체통을 들러 하루 온 종일 마음껏 먹어 부풀어진 체중을 다이어트도 시켜주고, 걸레로 여기 저기 마사지도 해 주며 항상 말끔하게 단장시켜 주었던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었다. 이제는 우체통을 찾는 이도 적어 졌고, 상대적으로 만져주는 손길도 적어진 게 사실 일게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사랑스런 빨간 우체통을 폐물로 여기고 그나마 길거리에 쓰레기를 내 던지지 않겠다는 일말의 양심을 살려서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쓰레기 통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마음의 생각이라는 우체통은 한도 끝도 없이 온 세상을 다 담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마구 가리지 않고 담다 보면 큰 일 난다. 배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소중한 것은 담아 두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설을 해야 한다. 제 때 제대로 배설하지 아니하면 배 터져 죽기 전에 나는‘똥 통’이 되어 버린다.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마 13:48)
내가 무엇을 자주 담음으로 인해 그런 그릇됨은 물론이려니와, 만일에 나에게 원하지 아니하는 말과 행동을 담아 공유하려고 다가서는 사람의 모습이 빈번해진다면 진지하게 담음으로서의 그릇된 나의 모습을 뒤돌아 볼 일이다. 한 청년이 씩씩거리며 들어와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정말 나쁘고 어리석은 녀석이 있어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막았다.“잠깐 네가 남이야기 하려면 세 가지를 자문해야 한다.”어리둥절해진 아들이 되물었다.“세 가지요?”“첫째, 아들아 네가 하려는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냐?”아들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글쎄요, 저도 전해 들었을 뿐인데요.”그렇다면“두 번째, “선(善)한 내용이냐? 그 이야기가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선한 것이어야 한다.”“글쎄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그러면 “세 번째로, 너의 이야기가 꼭 필요한 것이냐?”아버지의 물음에 아들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자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말했다.“네가 이야기하려는 내용이‘진실한 것도’‘선한 것도’‘꼭 필요한 것도’아니면 그만 잊어 버리거라.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남 이야기를 하려거든 그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험담은 한꺼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욕을 먹는 사람과 욕을 들어 주는 사람 그리고 가장 심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험담을 한‘자신’이란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성도들로 가득하다.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예배와 말씀묵상과 신행일치의 삶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여기시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가득 담고 소망의 즐거움 가득함으로 멋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는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억지로 털어 먼지 난 것들만을 담아 요깃거리를 삼는 성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입을 통해 내어 놓는 내용물들을 접할 때에 내용보다 더 궁금한 것은, 왜 그분에게만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의 그런류의 이야기가 담겨지는가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최고로 멋진 작품으로 태동된 내가 아니던가. 지금 나의 담음의 삶은 작가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도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으며, 처음 만드심의 원형이 전혀 손상되지 않음으로 나의 주변 사람에게 믿음의 소임을 감당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손실된 나의 담음의 내용 때문에 억울해 해야 하고, 나를 하찮게 여겨 그렇게 못난 것을 담으려 하는 사람 때문에 기분 나빠해야 하고, 나에게 그것을 주입하려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존심 상해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요즘은 학교도 관공서도‘담’을 허물고, 시각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담기 위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사람이든 건물이든 각각의 경계를 한하는‘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담’은 경계로서만이 아니라 담음의 의미가 있다. 나의 토지, 나의 일터, 나의 학교, 나의 가정을 담은 의미로서 말이다. 이웃과의 단절이 아니라 나의 담겨진 행복과 삶을 이웃에게 기쁨으로 나눠주고, 또한 이웃의 그 아름다운 것들을 나의 담 안에 담는 그릇으로서의 담이다. 실로 나만 배 불리기 위해서 담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잘 간직하고 배가시켜 주기 위한 저장소로서의 담인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고 아름다운‘담’은 많이 설정되어야 하겠지만, 추호도 생겨나서는 안 되는‘담’은‘험담’이라 생각한다.
이제 담음의 장소인 내 마음으로부터, 나의 가정, 내가 섬기는 교회, 내가 속한 공동체 등 이 모든 담음의 자리에 무엇을 가득하게 담느냐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따뜻하고 온유하고 너그러운 내 마음에, 행복하고 평온하고 사랑 가득한 나의 가정에, 예수님 이야기로 가득하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의 열정과 섬김으로 넘실대는 내 사랑하는 교회에 만일 누군가가 쓰레기를 부으려고 아무런 주저함 없이 다가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히 12:15)
그 좋은 담음의 자리가 어느 날‘빨간 우체통’과 같이 되지 않도록 그곳으로 몸과 마음을 자주 움직이자. 그리고 배가 부른지 배가 고픈지, 마땅히 담겨질 것이 담아 있는지 안을 들여다보고 헤아려 보자. 여기 저기 만져주고 보듬어 주어 사랑의 온기를 듬뿍 담아주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보람을 갖게 만들어 주자.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것을 담음으로 좋은 담음의 그릇으로 오인하지 말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가득 담은 그 담음의 삶이 되도록 여호와의 신을 덧입어 힘써 노력하자. 빨간 우체통은 쓰레기를 거절할 스스로의 힘이 없지만, 믿음의 빨간 우체통인 우리는 주님의 보혈이 가득 묻은 심장과 성령 충만함의 권세가 있지 않은가. 자, 그럼 오늘도 담으러 떠나 보실까!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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