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습관처럼 아내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나란히 산길을 걸었다. 벌써 흐드러진 진달래꽃에 물든 마냥 기분 좋은 아내의 얼굴은 연분홍이다. 우리의 생각과 시야를 방해하는 대상들이 없어서인지 손가락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오는 아내의 따뜻한 마음은 어느새 내 마음의 아궁이에 아지랑이로 사랑 지펴지고 있었다. 그런데 살며시 곁눈질해보니 이미 우리 둘 만의 산책길 가장자리를 예쁘게 수놓아져 있는 이름 모를 들풀들이 파릇한 기운 가득함으로 들러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이 고마운 모든 들풀에게도 저마다의 이름이 있을 터인데 각각의 이름을 불러주며 눈인사를 해야 하겠지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분명코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지 그네들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닐 게다.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알려진 식물의 종은 약 35만 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우리가 이름을 알고 그 속내를 알아 재배해서 먹고 있는 것은 약 삼천 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34만 7천 여 종은 우리가 재배해서 먹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잡초’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잡초’(雜草)란, 말 그대로‘잡스러운 풀’이다. 국어사전에도 잡풀, 즉‘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로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눈길과 손길이 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풀은 하나님의 기르심의 영역에서 생장하고 있음을 성경은 증언해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7:30)
또한 우리의 생각이 옅고 시야가 좁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풀들의 생애를 잡초생애로 치부해 버리는 누를 범해왔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중국 전국시대의 일화가 있다. 당대의 명의였던 편작에게 한의사 지망생이 찾아왔다.“저도 선생님처럼 유명한 한의사가 되고 싶습니다.”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편작은“온 천하를 다니면서 약이 될 수 없는 풀들을 모두 뜯어 오너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깊은 산야를 헤매고 다녔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빈 망태기만을 들고 돌아온 젊은이는“선생님, 온 산야를 헤쳐 봐도 약이 되지 않는 풀은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과제를 이행치 못했으니 그냥 돌아가겠습니다”하며 명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를 편작이 불러 세웠다.“그래 됐다. 하찮은 풀도 약으로 볼 줄 아는 것을 보니 분명 유능한 한의사가 될 수 있겠어.”편작은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 들여 의술을 가르쳤고, 훗날 그는 편작의 뒤를 잇는 당대의 명의가 되었다고 한다.
약(藥)이라는 한자어를 해부해 보면, 풀이라는 뜻의‘초두 머리’밑에 즐거움이라는 뜻의‘락’을 쓴다. 치료의 기쁨을 안겨주는 풀이 바로 약이라는 뜻인 것이다. 들풀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유심히 살펴 이름을 명명하고 그 쓰임새를 찾았던 옛 사람들의 지혜가 많이 존경스럽고 그립다.
「자연」이라는 명저를 남긴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Emerson)은 잡초를 일컬어 “그 가치가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이라고 했다. 이것 역시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자리하고 있지만 내가 알지 못한다고 앎의 영역 밖에 있는 모든 풀을 무가치한 존재로 폄하하려는 시도는 덜해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17세기 초인 조선조 광해군 때 편찬된 의학서적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지금 우리가 잡초라고 통칭하는 수많은 풀들에 대한 효능과 가치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떤 풀은 나물로 먹어도 좋다고 하고, 또 어떤 풀은 독성이 있어 먹지 못하는 대신 약제로 쓸 수 있다든지 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토양학자인 조지프 코캐너(Joseph A. Cocannouer)의 「잡초의 재발견( Weeds: Guardians of The Soil)」이라는 책은 잡초에 대한 상식에 포근함을 더해 준다. 그는 잡초가“작물이 영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길을 내주는 마법사이자, 작물의 생존터전인 흙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토양의 파수꾼”이라고 설명한다. 잡초가 작물의 성장을 가로막는 훼방꾼이 아닐 뿐더러 가축에게 오히려 좋은 먹 거리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근자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고려대학교 강병화 교수가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 100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종자은행을 세웠다고 한다. 그의 기사의 끝에 담긴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것입니다.”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꼭 필요한 곳,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산삼보다 귀하고,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개면 잡초가 된다는 말이다. 낚시꾼들에게는 대상어가 아닌 방해꾼 고기를‘잡어’라 하고, 옛 말에 사람 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잡놈’이라고 비하하는 말을 사용하곤 했다.
이쯤해서 자신의 이름을 몇 번 되 뇌여 보자. 나부터 내 이름 석 자가 어색하고 낯선 이름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부모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 소중한 가정의 품안에서 불리는 이름, 너와 나 사이에서 서로를 인식하게 만드는 이름,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늘의 일을 내어 맡기시면서 주신 이름. 그 많은 이름들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불리고 있고, 두리번거리지 아니하여 얼른 대답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꽤 오래 전에 한 후배에게 좋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양심수 황대권이 감옥에서 바깥 세상에 띄운 들풀 향기 가득한 생명의 고백서와도 같은「야생초 편지」가 그것이다. 그는 13년 2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감옥의 울안에서 서식하고 있는 야생풀들을 하나하나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고 더불어 즐긴 이야기를 잎의 주름과 줄기의 솜털까지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과 함께 그 풀들이 전해주는 깨달음을 오히려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전해준 편지 형식의 글이다. 따라서「야생초 편지」는 단순한 야생풀 관찰일기가 아니라 그네들 이름에 대한 복권이요 자기들을 잡초로 치부해 버린 인간에 대한 항변이었다. 이 책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풀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강아지풀, 산부추, 며느리밑씻개, 달개비, 수까치깨, 둥근 매듭풀, 바늘사초, 산국, 구절초, 쑥부쟁이, 사철쑥, 새콩, 괭이밥, 꿀풀, 새잎 양지꽃, 쇠뜨기, 조밥나물, 조뱅이, 애기똥풀, 석잠풀, 박주가리, 딱지꽃, 황금, 제비꽃, 달맞이꽃, 배초향, 땅빈대, 명아주, 물봉선, 쇠별꽃, 왕고들빼기, 수크령, 마, 비름, 쇠비름, 중대가리풀, 초피나무, 함박꽃, 여뀌, 방가지똥, 주름잎......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창조 걸작품인 인간과 나란히 세우고 싶기 까지 하지는 않지만 분명코 들풀도 하나님의 작품 중에 하나이며, 그것도 보시기에 좋아하셨던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2)
하나님의 창조 숨결로 지어지고 기쁨과 축복 속에 이름 붙여 이 땅에 심겨졌던 들풀들이‘잡초’라는 이름 딱지 붙여져서 내 던져지고 외면된 숱한 세월을 살았지만, 어느 누군가에 의해 자기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 순간이 있을 것을 믿기에 그리도 잡초들은 생명력이 끈질긴가 보다. 그 때의 기쁨의 몸짓을 연습하느라고 오늘도 한들한들 그리도 흔들어대는가 보다.
우리도 그 언제였던가, 잡초 인생을 살던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선사해 주셨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해 주시지 않았는가.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감격하고, 얼마나 기뻐했는가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혹여 신앙생활은 그럭저럭 하면서 믿는 자들끼리만 그저 서로를 합리화 시켜주고 자리매김해 주느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이름으로 이름 지어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며 이름값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그런데 참 아이러니(irony)한 것은, 세상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잡초와 같이 살아야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이름이 더욱 선명해 진다는 것이다. 겸손히 낮아지고 순종함으로 섬기면서 조연된 삶을 충실히 감당해야 생명책에 녹명된 이름이 짙푸르게 되고 우리 주님께서 내 이름을 하나님과 모든 천사들 앞에서 시인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5)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내 이름 붙여 주시어 끊임없이 불러주시며 에덴동산을 거닐게 해 주셨음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자.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동산을 거니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떳떳하게 부르도록 하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 나의 이름을 떠 올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이름을 각인시켜 보자.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시기 전까지 나는 잡초 인생이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음미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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