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세계에서 높이뛰기 챔피언은 흔히 알고 있는 벼룩이 아니라 거품벌레라는 연구결과가 과학 잡지 네이쳐에 보고되었다. 거품벌레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벌레로 고속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결과 몸길이가 6mm에 불과한데 무려 70cm를 뛰어오르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사람과 대비한다면 63빌딩의 높이를 뛰어오르는 셈이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점프능력이다. 달리기 챔피언으로는 주로 호주에서 서식하는 타이거딱정벌레가 있는데 녀석은 1초에 2.5m를 달릴 수 있으며 사람으로 치면 시속 1000km로 달리는 셈이 되어 F1경기 자동차보다도 빠르게 달리는 것이다. 얼마나 빠르면 그 벌레의 별칭이‘길 앞잡이’라 붙여졌을까?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반응속도를 가진 녀석은 사람들과 친근하지는 않지만 친숙한 바퀴벌레이다. 보이지 않는 바퀴를 가진 이 녀석의 반응속도는 감각기관에서 감지 후 근육으로 전달되기까지 1000분의 1초로 사람보다 100배 이상 빠르며, 운동신경 또한 뛰어나 이렇게 뛰어난 운동신경과 반응 속도를 이용해서 순간시속 150km로 스타트 대쉬하여 사람으로 환산했을 경우 최대 270km/h로 달릴 수 있으며, 자신의 키보다 몇 천배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다고 한다.
이건 바퀴벌레의 이야기고 이쯤에서 내 몸에 보이지 않는 바퀴역할을 하는 발의 노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발보다는 자기 멋을 추구하지만 정작 발이 좋아하는 착한 신발은 따로 있단다. 그래서 발이 발발 떨면서 하는 말이“멋 보다는 편안함을!”이다. 발은 우리 몸집에 비해 크기가 보잘 것 없이 작아 겨우 13분의 1 정도의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부분이지만, 뒤꿈치에 가해지는 하중은 빠른 걸음일 때는 체중의 1.5배, 조깅을 할 때는 2배, 뛰어올랐다가 착지를 하면 무려 6배로 늘어난다. 체중이 60kg이라면 한 번 뛸 때마다 양발에 약 120kg의 무게가 실린다는 얘기다. 이렇게 우리의 발은 그 힘든 수고를 묵묵히 견뎌내며 제 할 일을 해낸다.
사람을 비롯한 지구의 큰 동물들은 자기 몸을 지탱하고 관성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곤충들은 작은 몸으로 매우 성공한 집단으로 남아있다. 곤충의 몸이 작다는 것은 곤충의 근육(부피)이 단면의 넓이에 비해 작다는 것으로 이는 곤충의 근육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곤충들은 점프할 때 거품벌레는 자기 몸무게의 400배, 벼룩은 137배의 힘을 내는데 비해 사람은 자기 체중의 2-3배 정도의 힘을 내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한지 상상이 된다.
이런 놀라움과 함께 이제 서서히 그 녀석들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의 종을 종류별로 묶고, 생물학적 형태에 따라 유기체들을 계통화해서‘종속과목강문계’로 분류하는데, 방금 전 잠깐 동안 우리의 동공을 동그랗게 만들어 놀란 토끼를 만들었던 곤충들은 문 준위의 분류군에 의해‘절지동물 문’에 해당한다. 절지동물의 몸은 일반적으로 마디로 되어 있으며, 각각의 마디에는 관절이 있는 부속지들이 쌍으로 있어서 이로부터 절지(관절이 있는 다리)동물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체 수는 87만 9,000종 이상의 절지동물이 기재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약 86%가 곤충류이다.
곤충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족이며 남극에서 북극까지, 바다에서 산꼭대기까지 이들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은 없다. 지구의 정복자는 인간이 아닌 곤충이다. 우리가 흔히‘벌레’라고 부르면서 무시하지만 이들은 어느 동물도 살아남지 못하는 곳에서도 살아간다. 남극 만년설 속에서도, 끓는 온천수 속에서도, 동물 창자 속에서도 이들 일족이 살아가고 있다. 곤충은 알게 모르게, 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우리들 근처에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곤충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웃이자 불청객이다.
그러나 곤충들은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곤충의 활동을 통해 인류는 다양한 먹거리와 중요한 생산물을 얻기도 한다. 인간을 죽이고 살리는 전염병 대부분이 곤충에 의해 옮겨지고 있으며, 인간이 먹는 음식 중 3분의 1 이 곤충에 의해 수정 된 열매들이다. 동물이 먹다버린 음식이나 배설물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는 것도 곤충들이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은“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곤충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없다”라고 입을 모은다. 불현 듯‘벌레’라는 이름으로 몹쓸 것 취급만 했던 그네들이 인류사에 지대하게 공헌하는 바를 떠올리니‘곤충’이라 부름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라는 찬송가사(143장)가 떠오르는 것은 어인 일일까?
동물의 분류에 절지동물이 있다면 믿음의 분류에는‘절제동물’이 있다. 절제(節制)는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절제의 영역은 영적인 자리나 육적인 자리나 작용되지 않을 곳이 한 가지도 없다 하겠다. 우리가 흔히 절제하지 못하고 폭식하는 것을 보면“돼지처럼 먹는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상식이다. 확인되지 않은 소식통에 의하면 돼지들이 모여 인간들을 하나님께 고발했단다. 실상 돼지들은 음식이 위에 7-80%가 차면 아무리 맛난 것이 있어도 더 먹지를 않았기에“돼지처럼 먹는다”는 말을 인제는“미련한 곰탱이 인간처럼 먹는다”로 고쳐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곰탱이’들이 들고 일어날 소지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은 돼지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니, 돼지들이 과식을 해 배탈이 나서 뭐‘부채표’나‘위청소’를 찾고 수의과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고,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소를 본 적도 없고, 과로로 쓰러진 개미를 본 적도 없으며, 이리 저리 수군거려 이간질 하는 까치를 본 적도 없다. 그런 야단과 법석은 모두 다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자화상이다. 먹는 것이든, 일하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절제하지 못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제하지 못하여 인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빗대어‘금수보다 못한 사람’이라 했던가!
절제는 인생의 과욕을 조절해서 인생이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인 까닭에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절제의 소중함은 성경에서 만개한다. 성령 충만함의 꽃은 아홉 가지의 열매를 맺게 되는 데 그 중의 하나가‘절제’이다. 인간이 진정한‘절제동물 문’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은 성령 충만했어도, 내일 성령님과 무관하게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자동 탈퇴되어 제어되지 못한 숱한 결과들을 야기해 낼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런데 왜‘절제’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맨 마지막에 등장할까를 생각해봤다. 작고 덜 중요해서일까? 언젠가 외출하려는데 양복 단추가“툭”하고 떨어진다. 급한 김에 돌돌 말아서 구색을 갖춰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데 또 다시 떨어졌다. 마지막 매듭을 튼실하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제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 열매들의 면모를 보면 사실상 소중함의 경중을 따지기가 쉽지 않다. 그 소중한 열매들을 값지게 매듭지어주는, 아니 성령의 열매답게 완성시켜주는 또 다른 열매가 바로‘절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절제는 아홉 가지 열매의 매듭이요 다른 열매들을 성령님이라는 바구니에 잘 담기도록 만들어 주는 촉매제(觸媒劑)이다.
과수를 재배하는 농부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과일이 익어갈 즈음에 가장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에는 처음과 과정도 잘 해야 되겠지만 마지막의 중요함은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공통으로 인지하는 바이다. 절제가 없다면 모든 열매도, 노력도, 수고도 바닥에 쏟아질 수밖에 없다. 절제가 없는 기쁨은 너무 가볍고, 절제가 없는 화평은 태만이 되며, 절제 없는 인내는 무감각한 인생이 되고, 절제 없는 자비나 양선은 의존적 거지 근성을 만들 것이다. 또한 절제가 없는 충성은 과로를 가져오며, 절제가 없는 온유는 부드러움이 아니라 유약한 인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따라서 절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복을 잘 매듭지어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이다.
성경에는 순간을 절제하지 못하여 한 순간 내지는 인생 전반을 망치거나 망칠 뻔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함은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고, 그것을 입에 가두지 못하고 형제들에게 발설함으로 그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삼손은 여인의 사랑에 녹아나 절제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나실인의 비밀을 알려줌으로 두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고통의 끝을 보아야만 했다. 다윗도 욕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신하의 아내를 범함으로 날마다 침상을 적시는 눈물을 흘려내야만 하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한동안 보내야만 했다. 들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서는 허기짐의 요구를 절제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대로인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맞바꾸었다. 모세조차도 툭하면 원망하고 불평해대는 백성들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주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화남을 절제하지 못하여 반석을 여러 번 친 연고로 인해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생을 종식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정신적인 절제와 육신적인 절제가 필요하다. 더불어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인 의미의 절제가 더욱 필요함으로 요구된다. 세우는 것은 힘들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너짐은 찰나이다. 도마뱀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아픔으로 꼬리를 스스로 절제하고 살 길을 모색한다. 어떤 우화집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리스도인이 별세하여 천국에 갔더니 그곳에는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장애인’들만 모여 있더라는 것이다. 눈 한쪽이 없는 사람, 팔뚝 한 쪽이 없는 사람 그리고 귀, 발목의 한 쪽이 없는 사람이 수두룩하더라는 말이다. 이유인즉슨 죄와 악을 단절하고 절제를 온전히 이루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를 잃어서라도 남은 모든 것을 지켜온 참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 함께 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천국은 신체적으로 그런 분들이 그렇게 모여 사는 곳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자의 입을 열어야 하고, 거룩한 공동체에서 교제의 입을 사용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각별히 혀의 사용을 절제하기를 힘써야만 한다. 혀를 절제시키지 못하면 온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너와 나의 삶의 수레바퀴를 송두리째 불사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죽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저마다의 인생 앞에는 언제나 두 장의 카드가 던져진다. 미래의 약속과 현재의 욕망이라는 카드이다. 여기서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것들을 누르고 미래의 약속을 선택하는 것이 절제이다. 진리의 복음만을 들고 온 땅을 누비고 사람들의 가슴을 찾아들었던 바울은 그 달음질의 수고가 주님 앞에서 헛됨으로 판정받지 않기 위해서 수시로 양심에서 절제의 회초리를 꺼내 하나님의 원하심을 능가하려드는 모든 것을 단호히 제어하고 제거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리챠드 E. 버튼은 말하기를“절제는 황금 말굴레이다.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인간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닮은 자이다. 그것은 짐승 같은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닮은 자로 만든다”라고 했다. 절제된 아름다움은 우리를 사람답게 아니, 그리스도인답게 만든다. 불필요한 것을 다 덜어내고 나서 최소한의 꼭 있어야 될 것만으로 이루어진 본질적인 단순 간소한 삶은 아름답다. 그것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모습이기도 하다. 아름다움도 여러 빛깔이 있다.‘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도 있고,‘꾸며진 아름다움’도 있다. 아름다움에 어찌 등급이 따로 있을까마는, 아마도 최상급의 아름다움은‘절제된 아름다움’에 있지 않을까싶다.
절제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더더욱 자기 생각이나, 알고 있는 지식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령님의 인도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육체라고 내 마음대로 사용해서 있지 말아야 될 장소에 있다거나, 하지 말아야 될 행동들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영의 사람이 된 나는 이미 세상의 지도자급에 서 있다. 교회에서 장로나 집사 그리고 권사를 세우는 자격조건을 알려주는 성경 말씀에“절제”(딤전 3:2,11)의 자리가 매김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나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그는 말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때는 하지 않고, 일을 해야 할 때는 힘이 들어도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다. 기분 나쁠 때 기분 좋은 감정을 만들어 가는 것, 소망이 없어 보일 때 소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절제하는 사람들의 믿음 습관이다.
우리는 쉽게 말하고, 쉽게 낭비하고, 물질적인 것을 헤프게 쓸 때‘낭비’라고 부르고 물질을 아껴 쓸 때‘절약’이라고 표현한다.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감정을 헤프게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무절제’하다고 말한다. 절제된 생활은 단정한 생활이다. 그런 생활을 할 때 사회와 가정에 기쁨과 감사와 축복이 흘러넘치게 된다. 사도 베드로는 신앙의 7가지 단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먼저“믿음의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 우애를, 형제의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이다. 절제는 바른 신앙의 성장과, 곧은 믿음의 고착과, 날마다 이기는 삶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딤후 1:7)이라고 하셨다. 절제하는 동물 군에 속하여 그 행동반경이 항상 하나님의 능력의 손과 말씀에 의해 통제받는 은혜의 생애로, 절지동물보다도 더 멀리 더 오래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복음의 발자국을 짙게 아로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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