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정글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토박이 사냥꾼들은 원숭이를 잡는 영리한 방법을 알고 있다. 코코야자 열매에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구멍을 뚫어 속을 다 파내고 원숭이가 좋아하는 오렌지를 넣고서 줄에 매달아 놓고는 정글 속 으로 들어가 기다린다. 실바람에 실려 온 맛있는 오렌지 냄새를 맡은 원숭이들이 얼마 후 빼 꼼이 얼굴을 내밀더니 이내 냄새의 근원지인 코코야자 열매에 다가선다. 그 중 민첩한 녀석이 코코야자 열매의 구멍 속에 손을 집어넣어 오렌지를 움켜쥐는 것까지 성공을 했다. 그런데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간신히 비좁은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지만 오렌지를 움켜 쥔 손은 구멍을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원숭이는 그 손에 쥔 오렌지를 놓지 못하여 사냥꾼에게 포획되고 마는 것이다.
손을 놓으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고 살 길이 열려지는데, 세상은 끊임없이 내 것으로 움켜쥐어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내 안에 충분하리만치 행복의 요소를 채워 주셨건만 우리는‘이것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하며 돈과 명예와 권력을 움켜 쥔 손을 펴지 않으려 한다.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생동안 행복의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행복이 내 곁에 머물기를 원함으로 달라붙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섬겨야 할 내 손이, 주님께로부터 이첩 받은 사랑을 나누고 베풀어야 할 내 손이, 온 지구촌을 커다랗게 품고 복음의 사신되어 살아가야 할 내 손이, 그리고 문득 길거리에서 만난 소외의 그림자를 품고 사는 그에게 넌지시 소망의 빛을 안겨주어야 할 내 손이 지금 코코넛 야자열매 속에 갇혀있지는 않는지 내 손의 위치와 모양새를 빨리 찾아내야 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6-8)
신앙생활에서 매 순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세 가지 S’와의 싸움을 잘하여야 한다. 즉 Sin(죄)와 Self(자기)와 Satan(사단)과의 싸움이다. 이 중 자기와의 싸움은 죄와 사단과의 싸움의 격전장이 될 수 있다. 어릴 때 동네 어귀에는 가끔씩 약 장사가 이름도 약효도 모를 약을 한 보따리 이고 와서 펼쳐놓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획책하는 온갖 몸짓과 언어의 유희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꼭 내던진 말은“애들은 가라!”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약을 구입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어서이라기보다는 그의 입을 통해서 술술 쏟아져 나오는 음담패설(淫談悖說)을 수용할 수 없는 연령대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약 장수는 음담패설로 사람들의 배꼽을 잡게 만들고는 이내 그 손에 반드시 약을 구입해서 가게끔 만들었던 것 같다. 약의 효력이 신통 망통 한 것이 아니라, 구경꾼들을 들었다 놓았다를 몇 번만 반복하면 반드시 호주머니를 열 개 만든다는 것이 신통했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는‘약 장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속 깊은 질적인 의미는 사뭇 다르지만 설교라는 이름으로‘구약’과 ‘신약’의 신묘처방약을 성도들에게 소개한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은 설교자로서의 나는 성도들이 성전을 내려갈 때 마음의 약봉지에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충분히 구입하여 기쁜 발걸음을 옮기도록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105)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기뻐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지 사단과 죄악의 각축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약 장수의 말을 빌리자면“사단과 죄악은 저리 가라”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과 삶이 사단과 죄악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다.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지는 싸움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과 삶에 깊이 적용하여 내가 드러나고 높아지지 않도록 쳐서 하나님 앞에 굴복시켰던 것이다. 결국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싸움은 지는 싸움이 아니라 이기는 싸움이 되었다. 젊은 사업가인 워너 메이커가 하루는 장미화원을 잘 가꾼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종류의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런 다음 장미꽃들을 꺾어버리기 시작했다. 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쳐버리기도 하였다. 워너 메이커는“아니, 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가지를 잘라내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점점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되어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다고 한다. 보라, 전도의 대 거장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그 떳떳한 위용을 말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쳐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이 선한 싸움을 등한히 하는 까닭에 나의 생애를 사단과 죄악의 격전장이요 각축장으로 쉽게 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세상의 숱한 싸움이 있겠지만 자기와의 싸움만큼 어렵고 오래가는 싸움은 없다 싶다. 그 싸움은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가기까지는 지속 될 테니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사망과 죄악의 권세를 이기시고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능력과 권세를 입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기 위해 주님 앞에 모여 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간혹 성전에 발길을 옮겨 온 그리스도인 중에는 자기와의 싸움에는 관심 없고 다른 성도들과의 싸움에 목숨을 건 같은 그릇된 신앙생활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목적을 앞에 두고 동역함이 기쁨이 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되며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읽어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아픔과 상처와 죄악을 양산해 내고 사단의 통로를 열어주는 꼴도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 미운 사람을 일컬어‘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라 하지 않던가. 보고 또 보고 싶어야 할 사람은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되고, 진짜 꼴도 보기 싫은 사단과 죄악의 발자취가 내 언어와 신앙생활의 언저리에 자연스러운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보이지 않는‘기득권’이 실존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기득권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또 다른 몸짓이다. 그러나 내가 기득권을 잘 다스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되며 성도들에게 존귀한 사람으로 칭찬받게 되어야지, 기득권으로 나를 지키려 하고 어떤 권세나 권리를 누리려 하는 생각의 발상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마귀의 자녀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득권의 집을 세우게 만드는 생각에는 모태신앙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은 지 더 오래 되었다는 것, 이 성전에 먼저 발걸음을 했다는 것, 상대적으로 더 많은 영역을 감당할 직분과 사명을 받았다는 것, 성전 곳곳에 자신의 헌물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 등등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신앙 외적으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조금 우위에 있음을 적용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생각에 일침을 놓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라.“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또한 마가복음 10장 31절에도“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기득권 싸움은 신앙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이면 그 싸움이 생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는“역사란, 지상 모든 것들에 대한 기득권의 이동을 적은 기록이다”라고 말을 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 서슬 퍼런 감시의 가재미눈을 뜨고 주변을 얼쩡거리며 꼬투리를 잡았다 싶으면 이러 저러한 내용으로 고소하였지만, 실상은 종교적 기득권이 예수님께로 이양되는 것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교권주의자들의 못난 행동거지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한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성전에 기거하는 사람이 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의 반열에 세워진 사람이 신앙생활의 면모에 어느 한 구석이라도 기득권 운운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심히도 못 나고 부끄러운 모습일 지언 정 결코 잘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기득권을 버리자. 나 라는 코코넛 야자열매에 갇혀서 움켜 쥔 기득권을 내려놓고 손을 펴서 자유와 기쁨과 행복과 어우러짐의 은혜를 만끽하자.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모교인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의학을 공부한 후 1913년에 적도 아프리카(지금의 가봉공화국)로 떠났다. 슈바이처의 재능은 정말 대단했다.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그는 목사로 대학교수로 활동했으며,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파이프오르간의 연주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 당시 과도한 풍압(風壓)으로 오르간의 음색이 손상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위해 공헌한 바도 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음악의 대가인 바하에 심취하여 그를 연구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 중에서 3가지를 포기했다고 한다. 첫째는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했고, 두 번째는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대학교수직을 포기했었고, 세 번째는 풍요롭고 안락한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한 후 적도 아프리카의 오고웨 강변 랑바레네에 병원을 설립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아픈 이웃의 병을 고쳐주고 영적인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포기했던 것에 대해서 결코 미련을 갖질 않았다. 고난 받는 자를 위한 자신의 헌신이 오히려 그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를 갖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슈바이처의 희생과 사랑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더 큰 것으로 갚아주셨다. 슈바이처는 그토록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했었지만 바하 협회는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연주회를 아프리카에서 열어주었고 대형 오르간을 선물했다고 한다. 또한 존경과 명예가 뒤따르는 교수직을 포기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평생 동안 강의할 만한 강의 시간을 단 일 년 동안에 모두 허락하셨다.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그에게 대학마다 앞 다투어 초청해서 그의 강의를 듣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었지만 그가 저술한 자서전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신의 선택한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그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부질없는 기득권(旣得權) 싸움을 멀리 내어 던지고, 그 자리에서 기독권(基督權)을 사수하려는 싸움을 해야 한다.‘기독’(基督)은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 또는 구세주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생명의 종교를 기독교(基督敎)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기독권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그의 자녀에게 복과 생명의 자리로 세우시려고 주신 하늘의 능력과 권세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가 있는 기독권을 지켜서 나도 세움 받고,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이 세대를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 기득권 싸움은 고래 싸움으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생각지도 않은 새우 등도 터지게 만들지만, 기독권을 사수하기 위한 영적인 자기싸움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만들고, 관용하는 믿음을 양산해 내며, 나 보다는 남을 낫게 여기는 예쁜 마음을 펼치게 만들어 준다. 곧 그것은 하늘의 권세를 지닌 자의 담대함이며 여유로움이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댓글2개
기득권, 기독권 .....점 하나 차이가 삶의 모습과 가치를 다르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