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김에도 옷이 있다 하더니, 모든 날에도 손이 있다 또는 없다고들 한다. 우리 교회 지척에는 전주에서 제일 큰 웨딩홀이 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대로변의 갓길에 차량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고, 이내 교회 진입로며 교회 내 주차장까지 순식간에 점령하게 된다. 토요일에는 많은 성도들이 식사와 청소 봉사를 하기 위해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정작 우리 교인들은 주차 공간을 얻지 못해 여간 불편하지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몇몇 분이“오늘따라 웬 결혼예식이 이렇게 많데”하며 볼멘소리를 하게 되면 누군가가“오늘이 손 없는 날이라 그런다고 하네요”라고 말한다.
비단‘손 없는 날’은 결혼예식 날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이사할 때나 개업, 집수리를 할 때도 적용한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느 날과 다르게 이러한 모든 날은 더욱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왜 손 없는 날을 선호하는 것일까?
‘손 없는 날’에서‘손’은‘손님’을 줄인 말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악귀 또는 악신을 의미한다. 이 악귀는 날짜에 따라 동서남북 사방위로 바꿔 옮겨 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고 손해를 입히며 매사에 훼방을 놓는다고 한다.
갑자기 믿음의 사람들의 공공의적인 악한 마귀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택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한 마귀를 두들겨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방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싶다.‘손 없는 날’에 인생 행복과 형통을 기대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악귀는 음력으로 끝 날일이 1일과 2일에는 동쪽으로 돌아다니고, 3일과 4일에는 남쪽으로, 5일과 6일에는 서쪽으로 그리고 7일과 8일에는 북쪽으로 돌아다닌 단다. 그래서 이사를 하려하면 그 방향으로 악귀가 움직이는 날을 피하여 손 없는 날을 택일해야 한다나.
그러고 보니, 요상하게도 음력으로 9일과 10일은 빠져있다. 바로 그 날이 악귀가 쉬는 날 즉, 손 없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 날에는 예식장과 이삿짐센터 예약으로 전화통에 불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의 서 있는 위치를 조금만 바꾸면 언제나 손 없는 날이 될 수도 있고, 멋모르고 서 있다 보면 항상 악귀가 거니는 길목에 놓여있는 꼴이 아니겠는가?
사실 악한 마귀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치명타를 입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분명히 가라지와 함께 모두 모아져 불구덩이에 내 던져지기 전까지 시한부 생애가 되어, 마치 옛날 시골에서 닭을 잡기 위해 목을 비틀면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목 조르는 사람의 팔뚝에 상처를 입혔듯이 최후의 발악을 해 대는 것이다. 그 대상은 택함 받은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악한 마귀들의 미혹하고 훼방하여 넘어뜨리려는 행위는 어느 특정한 날이나 특별한 장소 그리고 특정한 방향에서만 손님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의 주변을 맴돌다가 틈만 생기면 다양한 방법으로 덮치려 하는 요물이다. 그러나 악한 마귀를 손님으로 모실 이유도 없겠지만 얼씬도 못하게 만들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항상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 분이 가정의 아랫목에 좌정하여 계시고, 심령의 중심에 모셔져 있으면 지레 겁먹고 혼비백산하여 갈 바 몰라 하며 도망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 28:7)
그런데 우리의 삶을 가만히 되짚어 보면, 그릇된 것들은 거침없이 내 가정과 삶의 자리에 침입하도록 문고리를 만들어 놓고는, 유독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기거하고 싶다고 문 두드리실 때면 내 가정과 마음의 안쪽에만 문고리를 만들어 놓아 내가 열어 드려야만 가능하게 만들어 놓는 것 같다. 웬 이유도, 핑계도 그렇게도 많은지 말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고 또한 많이 보아온 성화 중에는 윌리엄 홀맨 헌트의‘문 두드리시는 예수님’이 있다. 헌트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기초하여 이 성화를 그렸는데, 자세히 보면 우리 주님이 두드리시는 문에 문고리가 없다. 세상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중요한 문고리를 왜 빠뜨렸을까? 그것은 잘못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다분한 의도이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나의 마음 문 밖에 그리고 가정과 삶의 자리의 문 밖에 손님으로 찾아오셔서 오늘도 아니 지금 이 순간도 어김없이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때, 안쪽 문고리를 잡고 있는 우리가 문을 열어 드려서 나의 모든 자리에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문을 열어 드리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여전히 손님과 같이 어색한 머무름이 아니라 기쁨으로 더불어 계시도록 마음 편하게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솝 우화 중에‘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여우가 큰마음을 먹고 관계가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의 집에 두루미를 초대했다. 정성껏 다양한 스프를 준비했다며 날라 왔는데 모두가 널따란 접시에 담겨 있어 자신은 혀로 핥아 맛있게 먹고 있지만 정작 손님으로 초대받은 두루미는 뾰족한 부리에“콕 콕”찍히는 소리만 날뿐 먹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두루미는 초대에 감사한다는 마음으로 여우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그런데 모든 음식이 호리병처럼 주둥이가 좁고 속이 깊은 그릇에 담겨져 있어 두루미는 부리 빨대로 잘도 먹는데 여우의 입가에는 군침만 좔좔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둘의 관계는 호전되기 보다는 이전보다 더 응 얼진 결과를 낳게 되었다.
우리에게 문 두드려 찾아오신 내 주님을 문 열어 드렸다고 했다지만, 불편해 하고 근심하게 해 드려서는 안 된다. 기쁨으로 기거하시면서 모든 생애의 자리에서 온전히“더불어”가 되게 해 드려야 한다. 그렇게 우리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관계가 되어야 마음에는 평안의 진수성찬이, 가정에는 행복의 진수성찬이, 삶의 자리에는 형통의 산해진미가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차려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디까지나 손님은 손님이다. 시 부모님만이 아니라 친정 부모님도 오랜 시간 손님으로 머무시게 되면 서로 간에 생각지도 않은 불편함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영국 속담에는“손님과 생선은 사흘만 되면 냄새가 난다”그랬고, 우리나라 속담에도“손님은 갈수록 좋고 비는 올수록 좋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 오죽하면 라블레는“첫 날은 손님이지만 둘째 날은 짐이요, 셋째 날은 해충이다”라고까지 표현했을까? 물론 불편함과 부담감 사이에는 손님의 처세와 주인의 처세에 따라 다소 유동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굳이 불편함의 무게를 따지자면 그래도 시댁 식구들보다는 친정 식구들이 덜하지 않나 싶다. 생각의 차이가 삶의 향방을 많이 좌우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라도 문 열어 손님으로 모셔 들인 예수님이셨다지만 이것 저 것을 하려 치면 많은 눈치와 부담감을 안게 되며 제약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그 주님을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인정하고 범사에 선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범사에 상관자가 아니라 각양 좋은 것으로 이끄시는 지도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가정과 생애에 주인으로 모실 때 그분의 권능 있는 손에 의해‘악한 손’의 손길은 일곱 길로 도망하게 되어 모든 날이 복 되고 형통한 날이 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날에‘손 없는 날’을 찾으려 기웃거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 그 날을‘손 있는 날’로 선포하자. 그래서 손님으로 찾아오신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손에 강력하게 붙들림 받아 보장된 행복의 나래를 펼치자.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4)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요, 식사 때 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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