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4학년쯤 되었을까? 일찍 숙제를 마칠 때면 나는 종종 일곱 살 터울이 있는 작은 누나의 공부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열공’(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라는 말이 누나의 모습 때문에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묻는 말에 대답해 줄 리도 없겠지만 물어볼 틈이 없어 보였다. 한 쪽에 쌓아놓은 책 중에 슬그머니 국어책을 집어 들었다. 그림도 없고 글씨도 작아 재미없는 책이었다.‘다다다~ 닥’넘기던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글자가 있어 다시 몇 쪽을 뒤로 넘겼다.‘사슴’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내용의 의미는 몰랐어도 언젠가 아빠 엄마와 함께 동물원에서 보았던 순하디 순한 사슴을 추억하며‘사슴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외웠다. 그 이후로 나는 문학소년 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댈 때마다 이 시를 낭독(朗誦)하여 어깨에 빵을 세게 올리곤 했다.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작품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고귀한 꿈을 지키며,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의 체험을 노래한 시이다. 물론 사슴은 그것을 노래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 내지 상징일 따름이다. 사슴은 현실과 동조되지 못한 만큼의 무게로 외로움을 느끼며 길을 걷다가, 문득 물 속에 비쳐진, 지금은 전설처럼 되어버린 높은 족속이 되어 관이 향기로웠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그림자로 바라보며, 향수에 젖어 모가지를 쭈욱 펴고 그 때 향기로운 관을 하고 누볐던 영토인‘먼데 산’을 바라보고 있다는 좀 쓸쓸함이 담겨있는 시이다.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시 18:33)
‘사슴 인생’이 문득 높은 족속이어 관이 향기로웠던 전설적인 과거를 떠올리며 다시 동경하도록 만든 촉매제는‘그림자’였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이에게 과거의 영화로운 삶은 상대적으로 긴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그림자’는 물체가 빛을 가리어 물체의 뒤에 나타나는 검은 현상을 말한다.
조선의 제4대 왕이었던 세종대왕이 꽃 피운 찬란한 과학문명 중에는 지구의 자전 방향에 따라 햇빛에 비친 물체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으로 시간을 알 수 있게 만든 장치인‘해시계’가 있는데, 생김새가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글씨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서 12지신 그림으로 해시계의 시간을 표시하고, 대궐뿐만 아니라 여러 길거리에 설치해서 누구나 시간을 알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신하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한 가지 하자면, 한 신하가 황급히 왕에게 달려와서“전하, 해시계가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큰 재앙의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전하에게 말을 전합니다. 왕은 아무 말 없이 부리나케 해시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는 요리조리 살핀 후에 그 신하에게“네가 서서 해시계를 바라본 위치가 어디더냐?”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그 위치를 보았더니 해를 정면으로 등지고 서 있는 곳이었습니다. 왕은“참으로 미련한 자로고. 해시계는 해를 바라보아야 돌아가는 것인데 해를 감추었으니 너의 그림자만 덩그러니 서 있지 않겠느냐? 나라의 재앙의 징조가 아니라, 너의 앞날이 많이 갑갑하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해를 등진 그림자를 가진 신하는 책망을 들었지만, 해를 마주보는 해시계가 그의 뒤안길에 드리운 그림자는 많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안겨 주었다.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왕하 20:9,10)
역사적으로 해시계만큼이나 해를 좋아했던 인물이 있다. 거지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그 현명함만큼이나 때로는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느 날은 그가 대낮에 초롱불을 켜들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당신은 이렇게 밝은 대낮에 초롱불을 켜들고 무엇을 찾고 있읍니까?”라고 물었을 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나는 지금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밝은 대낮에도 정직한 사람이 안 보이니 초롱불을 더 밝혀가지고 그런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부정직한 세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상한 행동으로 일침을 주면서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또 한 가지는 드럼통 같은 술통 하나를 유일한 자기 집으로 삼고 이리 저리 굴려 이사를 다니면서 그 속에서 잠자고 먹고 살았다. 그러면서 때때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사람들은 왜 큰 집만 좋아합니까? 곤충이나 동물의 집들을 보세요. 자기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집에서도 겨울을 지내고 있잖습니까?”라고 말하면서 큰 집을 짓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비웃곤 했다. 어느 날 온 세상을 정복하고 더 정복 할 나라를 찾지 못하여,‘이 세상이 이렇게 좁단 말인가’하면서 세상이 작음을 한탄하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 갔을 때 주요 인사들이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을 환영하기 위하여 모두 나왔으나 디오게네스만은 나오지 않았다. 큰 인물이라야 큰 인물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오히려 알렉산더 대왕이 소문으로만 들어오며 만나보고 싶었던 큰 인물인 그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만나 보려고 그를 찾아 나섰다. 그 때 디오게네스는 술통 앞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에게 이렇게 물었다.“나는 그대의 현명한 지혜를 많이 듣고 배우고 있소. 그대를 위해 내가 해줄 일이 있겠소? 소원을 말 해보시오. 다 들어 줄 것이요.”그랬더니 디오게네스의 소원은 너무도 간단하고 평범했다.“내가 대왕에게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중이요. 그런데 대왕이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조금만 옆으로 비켜 주시지 않겠소?”알렉산더 대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돌아가면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나는 디오게네스이고 싶다.”
그렇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비추이는 해를 가릴 권한이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 해를 등지어 내 인생 앞에 검은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미련하다 하지 않겠는가? 내 인생의 프리즘으로 해를 바라보게 되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찬란함이 빛나게 되지만, 등지게 되면 오직 한 색깔, 검정만이 드리워진다. 해를 바라보면서 전진하며 살게 되면 그림자가 부러움으로 나를 따라 오지만, 해를 등지고 살면 일생동안 검은 그림자를 밟으며 눈물지으며 따르는 인생이 되고 만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그림자는 빛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내 앞 길에 길게 드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과 인생의 전 영역에서 그림자가 얼씬하는 순간 주저하지 말고 뒤 돌아서야 한다. 이제까지 마주보고 살면서 그리 크게 의식하지 못 하고, 거리감을 인식하지 못했던 빛이 여전이 내 뒤에 있음을 알고 속히 내 앞에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의 해이시다. 은혜의 해를 비추어 영혼의 광합성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나의 인생 프리즘을 통과하게 될 때 나타나는 색깔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무력하리만치 아무 저항도 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에게서 인생 시계가 멈춰버린 두 제자는 빛을 등지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들려온 소문은 한 가지로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어두움의 말 들 뿐이었다. 그 검은 그림자는 예루살렘에서 작게 드리우더니 금세 엠마오까지 늘려 뻗어졌다. 그 그림자의 길은 제자들의 영안도 귀도 멀어지게 만들어 어느 순간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음성을 듣고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었다. 제자들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영의 양식과 축사하신 떡을 떼어 먹여 주심으로 눈이 밝아져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한 때 부터였다.
내 스스로 검은 그림자를 지으려고 한탄하고, 눈물짓고, 원망과 근심을 하게 되면 더욱 짙게 채색되고 길게 늘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그림자가 짙고 길다 할지라도 등 돌려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의 햇살로 가득 안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 순간 내 인생에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 우리의 앞에는 빛이 드리워 있는 가 아니면 그림자가 손짓하고 있는가.“어험! 나는 지금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중이라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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