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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대림절의 깊은 묵상
임현희 2019-11-30 추천 0 댓글 0 조회 1398

대림절이란? 대림절이란 성탄절을 맞이하기 전 4주를 의미합니다. 2019년 대림절은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교회라는 주제 아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과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완성해 가시는 주님을 묵상하며, 기쁨의 성탄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대림절 기도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기쁨을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경솔하고, 서로에게 냉정하고, 서로에게 무심하고, 미움이 가득하여 한없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땅에서 바로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바르게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바르게 기도하도록 인도하소서. - 칼 바르트의 기도문에서 -

 

121(주일)마태복음 3:13-17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갈릴리로부터 세례 요한이 있는 요단강에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이제 후로는 온전한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겠다는 약속과 다짐의 의식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셨지만 그가 만류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요한이 죄 없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 한 매듭을 짓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의 길을 가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거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첫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은 이 말씀대로 모든 의를 이루어 가신그리스도로서의 삶이었습니다.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기다림의 계절이며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모든 의를 이루어 가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열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주님이 이루신 의에 합당하도록 늘 우리를 인도하여 주소서.

 

 

122()마태복음 3:1-12회개에 합당한 열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이 유대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부터 사람들이 나아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단강으로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라고 책망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도끼에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라고 일갈했습니다(8-10). 마태복음의 독자였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 의식과 영적 자부심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대림절은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는 계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과연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회개란 사람이 스스로 왕 노릇하며 자기 고집대로 살려는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결심은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에게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습니까?

기도/ 세례 요한을 통해 주신 도전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열매 맺게 하소서.

 

123()마태복음 4:12-17마을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셨습니다. 마태는 이를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한 예언의 성취라고 증언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했습니다(9:1-2). 이는 곧 메시야가 이방의 한가운데로 와서 구원 사역을 이룰 것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는 비록 유대 나라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이방의 요소가 훨씬 많은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어부들과 장사치들로 분주한 마을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구원의 빛, 참 생명의 빛을 비추러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메시야임을 확증해야 할 곳은 요단강고, 광야도 아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마을 한가운데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 이방 마을 한가운데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자신의 삶 한복판에서 예수님처럼 구원의 빛을 비추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흑암과 사망의 그늘 가운데서 생명의 빛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기도/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한복판에서 늘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124()마태복음 4:18-25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은 주 사역지였던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라는 부름에 그들은 곧장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어부뿐만 아니라 세리와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이시며’‘가르치시고’‘복음을 전파하시고’‘고치시는사역을 하셨습니다(23). 이에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곳곳으로부터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까지 고쳐 주셨습니다(24).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는 에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예수님의 초청에 이 세상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도구와 통로가 됨으로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두루 다니며돕고 고쳐야 할 이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합시다.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복음을 전파하며 평화와 생명의 길에 동참합시다. 이 일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묵묵히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께 기도하며 대림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기도/ 우리의 눈을 열어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보게 하시고,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돕게 하소서.

125()마태복음 5:13-16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여덟 가지 복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성품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셨습니다(13-14).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사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그 자체로서 고유한 기능이 있습니다. 짠맛을 내며, 밝게 비춥니다. 때문에 제자는 박해의 땅이요, 어둠이 깃든 곳에서 스스로를 녹여 맛을 내는 소금처럼, 스스로를 태워 비추는 빛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제다는 소금답게, 빛답게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명을 감당할까요? 예수님은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되,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고 일러 주십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16). 어제보다 오늘 더 소금과 빛으로 살아봅시다.

기도/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하소서.

126()마태복음 5;17-37율법의 회복을 위해

계속되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를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예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형제에게 노하기만 해도 살인이며,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이요, 맹세하는 것은 모두 악으로부터 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분히 마태복음의 독자였던 유대인들을 의식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의미를 왜곡하여 타인을 정죄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원래 목적을 회복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율법의 목적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시고 가르치신 사랑의 법을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다가 구덩이에 빠진 자를 살려 주시고,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행함 속에서 우리는 율법의 회복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기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율법의 의미를 회복하여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127()마태복음 5:38-48온전하라

구약에서는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일체의 복수를 금지하시고 구약의사랑법을 보충하십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 그것입니다(44).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바울은온전함성숙이라는 의미로 받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날로 닮는 목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몸소 보여 주신 삶을 통해 우리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는 일까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맞은 채로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억울한 누명과 심한 욕을 들었으나 그대로 가만히 있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원수 대하듯 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데까지 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좀 더 긍정적인 마음과 적극적인 생각으로 이웃을 품어봅시다. 그리고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좌절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봅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넉넉히 감당할 힘과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의지와 방향에 대해 도전하십니다.

기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128(주일)마태복음 5:1-12복 있는 사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1). 여기에서무리는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 지쳐 힘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아픈 이들은 대개 가난했고, 위로가 필요했으며, 긍휼과 자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늘 슬픔과 낙심 가운데 머물며, 삶 속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이 땅에서 사랑받고, 축복 받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아프고, 절망하고, 힘들어 하며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감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자신 앞에 나아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3-10).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하늘의 큰 상급을 받고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이 복된 길을 걷자 하십니다. 우리 곁에 오신 분은 이와 같은 분입니다. 그분이 복이요, 그분을 따르는 이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 복으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또한 언제나 어디서나 복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129()마태복음 6:1-8은밀한 중에

우리는 선행이나 공적을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기를 훨씬 좋아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선한 일이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칭찬이나 보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 자체가 은밀한 역사였습니다. 그분은 중동의 시골 마을에서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라한 십자가에 달리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 어떤 위인의 선행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사역을, 예수님은 전혀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셨다는 듯이 묵묵히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칭찬을 받는 그런 삶 말이지요.

   나의 삶과 기도가 오직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 있는지 돌아봅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와만 은밀하게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늘 함께하시며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도/ 예수님처럼 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으며, 선한 열매를 맺을지라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 안에서만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210()마태복음 6:19-24하나님만 섬깁시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낼 보라는 시험, 그리고 천하 만국과 영광을 얻는 조건으로 마귀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4:1-11). 이 시험들은 하나같이 인간이 세상에서 충족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곧 돈,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런 조건들을 갖추고 그리스도 노력을 하려 했으면 훨씬 더 수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들을 단호하게 물리치며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이 시험은 우리에게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돈과 권력, 건강, 명예, 인간관계, 자녀에 대한 욕구 등. 마귀는 훨씬 더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극합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보다 더 가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원하는 다른 것들을 올려놓곤 합니다. 그것이 바로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상을 내려놓을 용기를 가집시다.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을 따릅시다.

기도/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는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지게 하소서.

1211()마태복음 7:1-6내 눈에 있는 들보

건축을 진행할 때의 의식 중 하나로상량식이 있습니다. ‘상량은 세운 기둥에 보를 얹어서 집의 골격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 들보는 집의 무게를 견딜 만큼 크고 든든해야 합니다. 큰 들보는 수십 명이 매달려도 끄떡없는 규모이니 사람의 신체 일부와는 절대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두고눈 속에 있는 들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상대방의 허물은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잘못은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극히 작은 것이지만, 나의 죄와 허물은 그 크기를 상상할 수 없는 규모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죄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죄나 잘못을 참 빨리도 그리고 크게 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들보같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무거운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봅시다. 그리고 그 들보를 빼내어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해 봅시다.

기도/ 내 속에 크게 자리한 죄는 정확히 인식하고, 형제의 허물은 지나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소서.

1212()마태복음 7:7-1구하고, 찾고, 두드립시다

한 아버지에게 시집보낸 딸이 있었습니다. 딸의 신혼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얼굴을 자주 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귀갓길에 딸의 집 앞에 지나게 되어집에 있으면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금세 달려 나온 딸을 보고 반갑고 예뻐 지갑을 열어 손에 돈을 쥐여 주었습니다. 귀가한 남편의 흐뭇한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비싼 인사값을 치렀다.”며 웃었습니다. 이렇듯 부모는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줄 수 있는 한 많이,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줄 형편이 안 되면,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분은 높고 영화로운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구하면 얻게 하시고, 찾으면 찾게 하시고, 두드리면 문을 열어 주십니다. 사람도 자녀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사신 우리에게는 더히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께 마음을 드려 간청해 봅시다.

기도/ 바라는 것보다 더 크고 좋은 응답을 내려 주실 주님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끝까지 기도에 임하게 하소서.

 

1213()마태복음 7:12-20대접합시다

성경에는 별명이 붙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중 마태복음 7:12황금률이라고 불립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 윤리의 집합점이며, 규범의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접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접을 받으면 나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접하는 삶, 섬김의 삶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절을 맞아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예수님은 생명으로 우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 주시면서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목숨을 다해 우리를 대접해 주신 은혜를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힘을 다해 이웃을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병든 이웃, 가난한 이, 좌절에 빠진 이, 분노의 감정을 가진 이 등, 우리 주변에는 나의 대접을 기다리는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봅시다.

기도/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단계에서 사랑을 주려고 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이 전해지게 하소서.

1214()마태복음 7:21-27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유발 하라리의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는 책에는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어서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사람보다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을 더 신뢰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의 생각보다 무지합니다.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뜻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내 뜻과 의지를 하나님께 강요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무지와 부족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로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나의 뜻이나 의지와 다르더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기도/ 나의 무지와 부족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며, 따르는 삶을 살게 하소서.

1215(주일)마태복음 8:1-4예수님의 손

예수님이 갈릴이 지역에서 전도하시던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 한센 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구합니다.“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

정결법에 따르면 결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 나왔습니다. 당시 한센병자들은 성문 바깥에 머물며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꾸짖거나,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그리스도답게, 하나님의 아들 답게 손을 내밀어 그와 접촉하셨습니다.“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

   한센병자의 병은 나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그러한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으로 우리 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하며 기다립시다.

기도/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원하신다면 온전해질 것을 믿게 하소서.

1216()마태복음 8:18-27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성경에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 이미 따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권능이 부담스러워서 멀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은 머리 둘 곳 없는 일상을 견뎌야 했습니다(18-20).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도 아버지의 장례를 불참할 만한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21-22). 또한 예수님의 큰 권능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멀리하기도 했습니다(8:28-34).

   이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위협하는 여러 힘겨운 환경이 늘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는 우리에게믿음이 작은 자들’(26)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곧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셔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해 주십니다.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감에 있어서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믿음을 소유합시다.

기도/ 소란한 이 땅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하소서.

 

1217()마태복음 9:14-17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예로부터 사람들은 시간을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일정하게 구분한 기계적인 단위의 시간이며, 둘째는 특별한 사건으로 기억하는 의미적인 단위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살았을지라도, 각자 다른 의미로 과거를 기억합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14).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소중한 시간을 누리고 기뻐함이 마땅하다고 여기셨습니다. 금식은 훗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셨을 때에야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5).

   이번 대림절 기간을 후에 어떻게 기억하기를 원하십니까? 형식적으로 이 기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갈망하며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한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때 추억들을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도 주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하소서.

1218()마태복음 9:27-34 작은 예수로 살아갑시다

별명은 그 사람에 대한 몇몇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당시 많은 별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에수님을다윗의 자손’(27)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셔야 할 분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시며,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가난하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다윗의 자손이여’(27)라고 외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별명은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할 때, 우리는 그 별명에 걸맞는 삶을 살고자 애써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마을에서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차곡차곡 쌓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작은 예수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기도/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큰 사랑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1219()마태복음 9:35-10:1 불쌍히 여김

이 본문의 추수란 심판에 앞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모으시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공동체를 모으는 주체로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그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더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예수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36).

   예수님은 먼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제자로 불러 주셨고, 주님은 마음을 대언할 자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여전히 이기적인 마음에 함몰되어, 세상에서 고생하며 기진하는 무리들을 바라보지도, 예수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도 못한다면 결국 세상은 교회를 등지고 말 것입니다. 혹여 귀신을 쫓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권능을 우리 자신의 안락과 잘됨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데 사용하며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돌보아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에게 손길을 내밀 수 있게 하소서.

 

1220()마태복음 11:2-15 참된 메시야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대비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시며, 돌보시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 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지자들의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 그리고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서 이해했던 메시야의 모습과는 다른 예수님의 행함 속에서 예수님이 과연 예언된 그 메시야가 맞느냐?’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세상의 부조리하고 잘못된 구조들로 인해 선한 행위가 무시되고 도리어 억압당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곤 합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인내와 사랑이 함몰될 것 같은 두려움과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예수님의 사랑의 메시지는 과연 정답일까?’라는 의문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라고 계속해서 물으시면서, 진정한 메시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참된 메시야가 어떠한 분인가를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치유와 화해의 중개자가 되게 하소서.

1221()마태복음 11:25-30 참된 쉼으로

성경의 용어와 표현들을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28)라는 표현을 쉽게 해석하면마음의 평안을 준다는 뜻이 되는데, 이런 해석대로라면 예수님은 심리치료사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사 정도의 인물로 오해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은 인간의전인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져 죄에 빠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쉼,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25)로 표현된 서기관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말씀을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지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27)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기준으로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참된 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통해 주어집니다.

기도/ 우리의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게 하소서.

 

1222(주일)마태복음 13:10-23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성탄절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동방의 지혜자처럼, 양을 치는 목자처럼, 보다 민감하고 섬세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의 마지막 구절은귀 있는 자는 들으라”(13:9)입니다. 이어진 말씀에서 예수님은깨닫는 귀와 깨닫는 눈에 대해 강조하시며 이를 가진 이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16). ,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10:23).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겸허함과 열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때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 봅시다. 돌밭 같은 내 마음과 가시떨기 같은 나의 생각과 길가처럼 세상에 시달려 딱딱하게 굳어진 나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좋은 땅으로 가꿔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기다립시다

기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즐겁게 맞이할 수 있도록 보아야 할 것을 보는 눈과 들어야 할 것을 듣는 귀를 주소서.

 

1223()마태복음 13:34-43 감추인 것들

세상 첫날부터 신비로 감추어졌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비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알고,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드러내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십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인자이고, 밭은 세상입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제자가 된 이들의 삶을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켜 가십니다. 인자의 수고와 땀을 통해서 씨앗은 자라나 거룩하게 무르익어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꾸밀 것입니다(43).

엄마가 되어야 엄마의 마음을 알고, 아빠가 되어야 아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알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억하며 닮아 가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마음은 우리 마음밭에 뿌려지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신비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탄의 계절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시작되었고, 에수님의 삶 속에서 충만했던 하나님의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맞이하는 은혜를 누립시다.

기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신분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늘 우리의 마음밭에 자리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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