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공지

  • 나눔과 쉼 >
  • 교회공지
2019사순절의 깊은 묵상
임현희 2019-03-04 추천 0 댓글 0 조회 1701

2019년 사순절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힘 있고, 권력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을 떠나 영문 밖, 곧 힘없고, 희망 없고, 생명 없는 자들에게로 나아가셨습니다.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 주님이 가셨던 영문 밖으로 이제 내 십자가를 지고, 우리 세상의 영문 밖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지난 삶에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을 되새기고, 그 사랑을 흘려보내고자 몸부림치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고백과 다짐 속에 2019년 사순절을 보냅니다.

 

36() / 1 / 9:22-27 /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를 무엇인가요?

오늘은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나에게 예수님은 그분의 길이 어디로 향하여 있는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셔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제자들이 오해한 것처럼 예수님을 위한 큰 영광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려져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자신의 목적지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세상의 복과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는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을 넘어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나의 어깨에 짊어지는 구체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를 구하며,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사순절을 맞이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성찰과 다짐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7() / 2 / 9:28-36 /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 가운데 계셨고, 지금도 홀로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고,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살아가시니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이 땅을 살아가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감추어졌던 그 영광이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영광 가운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의 대화 주제가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모습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여기 한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인간의 모든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참 모습을 조금씩 알아 갈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분 앞에 우리를 순복하여 따르게 됩니다.“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기꺼이 따르게 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8() / 3 / 9:37-43 /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감격했던 경험이 있나요?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43). 예수님의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위엄과 영광은 산 아래로 내려오셨을 때보다 변화산에 계실 때 더욱 빛났을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에 계실 때나 산 아래 계실 때나 한 결 같이 여전히 한 영혼을 사랑하셨고,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분이셨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들의 바로 옆에서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그 장면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위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적도 이와 같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인간이 발견하는 자리는 하늘의 보좌가 아니라 이 땅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인생들이 그 억눌렸던 멍에에서 주님으로 인해 자유하게 되고,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림을 경험하는 자리가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경험해야 할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또 그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함께 경험하고 싶은 이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랑하신 한 영혼 옆에 우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9() / 4 / 9:51-62 /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시자 먼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마을로 가셨고 제자 삼고자 계속해서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어떤 이는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요청하고, 또 다른 이는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사람을 찾기가 이만큼 어려운가 봅니다. 그 뒤에 펼쳐질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사모하지만, 정작 십자가의 길은 회피하는 이들에게 토마스 아 켐피스는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어찌하여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첩경이 될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으며,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십자가 안에 축복과 기쁨이 숨겨져 있습니다. 십자가 이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영혼의 구원과 영생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십시오”(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 / 하나님을 열애한 주기철 목사(1897-1944)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을 열애한 분이다. 그는 신명기와 시편을 좋아했으며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고나의 좋은 것은 주밖에 없도다라고 고백했다. 그는예수님은 공생애의 시작을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마무리할 때도 아버지로 마무리하였다. 주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정을 알았고 뜻을 알았다.”라고 고백했다.

   주기철 목사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실로 깊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에 대해, 깊고도 뜨거운 사랑에 대해 이해했다. 주기철 목사는 이 사랑을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주 목사는 아펜젤러 목사가 증기선의 일등실 승객으로 구조될 수 있었음에도 조선 여학생을 구하려다 죽었다고 하며, 하나님을 열애하는 것은 곧 한민족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전했다. 또한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도 하나님을 순수하게 열애한 까닭에 기꺼이 고문과 죽음을 택한 그는 도마의 말처럼우리도 또한 같이 가서 죽자.”라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권유하고 있다.

 

311() / 5 / 10:17-24 / 아버지의 뜻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무리들 중에 70명을 따로 세워 주께서 친히 가시려던 각 동네와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10:1). 주님의 말씀을 들고 각 동네와 지역으로 갔던 제자들이 주님 앞으로 기뻐 돌아왔습니다(10:17). 그들은 주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말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한 기쁨에 함몰되되 말고,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셨을까요? 구원은 결단코 인간의 지혜나 수고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대속의 사건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알고 그 비밀을 보고 듣고 말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날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12() / 6 / 10:25-37 /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게 은혜를 베풀 이웃을 찾고 있나요? 아니면 내가 은혜를 베풀 이웃을 찾고 있나요?

한 율법교사가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 대신 그 문제에 대해서 율법에 무엇이라 되어 있는지 되물으셨습니다. 율볍교사는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 했던 율법교사가 또 물었습니다.“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이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행 중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이 구해 주었다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는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자신의 율법 지킴이 옳다 증명하고자 했던 이에게 예수님은 필요를 채워 주는 이웃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율법의 잣대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바로 영생을 얻는 길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313() / 7 / 10:38-42 / 좋은 편을 선택하라

나는 전심으로 예배에 집중하고 있나요?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한 일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전도여행으로 지치고 허기진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한다는 것은 큰 영광이요 기쁨이었기에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재료로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손은 더디고 마음은 답답했습니다.

   한 사람의 일손이라도 아쉬운 때에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말씀을 들을 때가 아니라 자신을 도와주어야 할 때인데, 눈치 없이 행동하는 마리아가 야속했나 봅니다. 참다못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자신을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명령해 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것을 선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나아가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올바른 섬김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온전히 나아가고 있습니까?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주의 사역, 주의 일에, 해야 할 여러 가지 회의와 봉사에 생각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 모든 정성을 다 바친 예배와 내 귓가에 들려진 말씀이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빼앗기지 않을 영원한 말씀, 내 맘을 사로잡는 말씀을 붙드는 사순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14() / 8 / 11:1-4 /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곤궁이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소원이나 기대를 이루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기도의 대부분이라면, 그것은 기도에 대한 오해요 큰 오용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달라고 한 제자들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기에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올려 드림이 마땅합니다.“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매일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연약한 본성 때문에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우리를 지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짧지만 기도가 영적 호흡이요, 미천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가 될 수 있는 방법임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릴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315() / 9 / 11:5-13 /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에 응답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나요?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친구 때문에 먹을 것을 꾸러 온 사람의 끈질긴 간청이 마침내 이루어진 일을 비유로 들어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구하지 않은 것은 얻을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입니다. 구하는 이는 구한 것을 받을 것이고, 무엇을 찾는 사람은 그것을 찾아낼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없다면,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미래의 무수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씨앗과 같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의 씨앗을 뿌립시다. 때가 되면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후히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가 끈질기게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성령을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넉넉히 이길 힘과 능력을 주시고자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316() / 10 / 11:14-20 /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나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며 자기 나라를 무너지게 하겠느냐고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탄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굴복시키고 무력화시키셨습니다. 사탄에게 종살이하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승리하신 분입니다. 그 어떤 권세도 예수님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이기셨습니다. 사탄을 이긴 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사는 영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에 이미 참여한 사람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죄와 사탄이 권세 잡으려 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영생과 구원의 기쁨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일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317(주일) / 사순절 두 번째 주일 / 국제정세를 믿음으로 읽으며 민족과 함께 걸어온 현순 목사(1879-1969)

현순 목사는 현재창의 아들로 개화된 역관의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러한 배경은 현순 목사의 행보에 등불이자 굴레가 되었다. 그는 3.1운동 후 독립정부가 절실히 필요할 때 33인을 대표하여 상해로 홀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그 시대에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어서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누구도 맡지 않는 상황에서 임시정부라는 민족의 짐을 홀로 지는 현순 목사의 심정은 십자가를 대하는 주님의 마음과 닿아 있다.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교회를 부흥시킨 후에 부흥사로 각지를 다니며 역동적으로 전도하였다. 그러다가 독립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천도교 대표 최린과 합동하여 상해 행을 추진하였다.

상해로 향하는 그의 품속에는 최남선이 기초한독립선언서가 있었다.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정부의 조직을 구성한 다음 인사들을 찾아서 조직을 완성하려고 중국과 러시아, 조선을 넘나들었다. 또한 3.1운동을 파리강화회의 등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초기 정부에서 그는 역관 출신이라는 당시 신분의식에 막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자리에서 또한 성실히 민족사랑을 실천하였다.

 

318() / 11 / 11:33-36 / 예수님, 영혼의 등불

나의 영적 안목의 밝기는 과연 어느 수준일까요?

등불을 켜는 것은 밝히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등불은 위에 둡니다.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밝은 등불 아래서는 모든 것이 편리하고 편안합니다. 눈은 몸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눈의 밝기에 따라 온몸의 밝기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눈은 외부 세계의 것이 마음으로 전달되는 통로이며 동시에 마음의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밝아야 하지만, 더욱 밝아야 할 것은 영혼입니다. 그렇기에 영적 안목이 밝아야 합니다. 영적 안목이 밝아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이를 영적 분별력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영적인 안목은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내면화될 때 생깁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영적인 안목이 생깁니다. 내적인 빛을 통하여 온몸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악은 잘못된 분별력에서 옵니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지만, 눈이 어두우면 곧 온몸이 어두워집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예수님에 대해 깨어 있으면 영적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혼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혼의 등불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비추고 있습니까?

 

319() / 12 / 12:4-7 / 예수님은 나의 친구입니다

함께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삶의 평안을 누리고 있나요?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며 두렵게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권세가 그러합니다. 세상의 돈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두려움도 겨우 우리의 몸만 죽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 바로 우리의 영혼과 영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당시 한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온이고, 참새는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렸다는 것은 한 마리가 덤으로 간 것입니다. 흔하게 거래되는 참새 두 마리에 덤으로 준 나머지 한 마리에 대해서도 아시는 하나님, 심지어 내 머리에서 매일 빠지고 새롭게 나는 머리카락조차도 세세히 아셔서 세실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 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를 바라보시고, 나의 생명과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세상에 함몰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시는 분, 우리의 친구 되신 주님입니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친구라 불러 주시고 함께하심으로 인해 오늘도 평안을 누리기 바랍니다.

320() / 13 / 12:13-21 /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지금 나의 창고에 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무리 중 한 사람이 유산에 대하여 분배요청을 하자, 예수님은 재물의 유산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셨습니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유에 대한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이 같은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탐심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재물이 적은 사람은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재물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이 갖고자 갈등합니다. 사람의 소유욕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물질과 가치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닌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생명이 천하보다 크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둡니다. 그리고 그 쌓아둔 재물을 보고 안심합니다. 그러나 그 재물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을 쌓는 것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물을 사용합니다. 재물을 이용해 하나님 나라를 일구며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의 창고에 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의지하여 살기로 작정합니까?

321() / 14 / 12:22-34 /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할 필요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경에는걱정하지 마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365일 매일 걱정거리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살 것 등 살아가는 자체가 염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셔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까마귀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귀한 것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은혜로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것으로 기꺼이 이웃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넉넉히 구제하여 낡지 않는 배낭과 샐 곳 없는 하늘 창고에 보물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322() / 15 / 13:1-9 / 회개하지 않으면

십자가 아래에서 여전히 회개하지 못한 나의 죄는 무엇인가요?

두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빌라도가 벌인 악행을 전합니다. 그는 제단에 드릴 재물이 갈릴리 사람의 피를 섞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행위는 반인륜적이며, 비신앙적인 악행입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터인데, 이런 치욕적인 일을 겪은 갈릴리 사람들은 과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지은 값을 받은 것일까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뜻밖에 겪는 환난을 말합니다. 실로암에 서 있던 튼튼한 망대가 갑자기 무너져열 여덟 명이 죽는 날벼락 같은 재앙을 만났습니다. 이들에게 내린 재앙은 과연 그들이 극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내린 형별이었을까요? 이들이 비교 불가한 죄인들이어서 유별난 심판을 받은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의인이어서 이러한 충격적인 형별들을 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인류는 원래 모두가 죄인이기에 스스로 죄의 형벌을 피할 가능성을 가진 인물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베푸신 전적인 은혜로만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참여하는 믿음의 첫걸음은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피할 길이 없으나 회개하는 성도는 속량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죄 많음을 바라보고, 우리의 죄 많음을 바라보고 그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십자가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오늘 회개의 자리에 나아갑시다.

 

323() / 16 / 13:18-21 / 하나님 나라의 비유

큰 나무로 자라게 하고 싶어 내 안에 심고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요?

한 교회 근처에 성도들을 위한 주말농장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성도들은 밭이랑에 여러 가지 씨앗들을 뿌립니다. 둘깨, 참깨, 가지, 고추, 감자, 고구마, 방울토마토 등 깨끗하게 정된된 밭에 씨앗을 뿌리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점 싹이 움트고, 줄기가 뻗고,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자라 결국엔 여러 가지 열매를 얻습니다. 성도들은 거둔 수확물들을 함께 나누면서저 열매들이 언제 저렇게 컸을까? 어디 숨었다가 나왔을까? 놀람과 기쁨과 신비한 감정을 공유합니다. 식물도감에 의하면 씨앗에 비해 다 자란 줄기의 비율 차이가 가장 큰 것이 바로 겨자 나무라고 합니다. 눈에 겨우 보이는 작은 점 같은 겨자씨가 자라 1.5-3m에 이르는 나무가 된 것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심령 안에, 그리고 삶 속에서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작은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은 자라고 자라 많은 이들과 함께 기뻐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겨자씨를 심는 것과 같은 믿음의 행위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을 통해 역사하시고, 씨앗이 성장하듯, 점진적이지만 반드시 올 하나님 나라를 우리 성도들이 삶 속에서 체험하기 원하십니다. 오늘도 변함 없는 믿음의 한 걸음을 힘차게 내딛는 성도가 됩시다.

 

324(주일) / 사순절 세 번째 주일 / 길선주(1869-1935)의 고통

길선주 목사는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완전한 인간으로서 받은 형벌이며, 인간의 죄악 전체를 대신하여 받은 것으로 일종의 영적인 형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주님이 받으신 형벌은영적인 또는 육적인 대형벌, 대고통의 만겁, 지옥 고통의 총합 이상의 것이었나니 우주도 견딜 수 없어서 백일의 빛을 잃고, 대지도 감당할 수 없어서 깨어지지 아니치 못할 고통이었다. 길 목사는 예수님의 12고난을 말하는데, 5고에 심문받는 고난을 말하며 자신도 법관에게 심문받은 고난을 큰 고통 중의 하나라고 진술한다.

   그는 3.1독립선언서에서 33인 중 1인으로 서명하고, 선언서 선포식에 가야 했지만 부흥회를 인도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부흥회를 끝내고, 자진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05인 사건으로 장남 길진형을 먼저 보내는 고통을 겪고 차남 길진경까지 감옥에 수감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예수님의 고통을 온 영혼과 온몸으로 받아들인 길선주 목사는 민족의 고통을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으로 함께 그리고 그대로 수용하였다.

 

325() / 17 / 13:31-35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을 다시 십자가로 내모는 나의 심각한 죄는 무엇인가요?

로버트 라이턴은죄는 처음에는 즐겁고, 다음에는 쉽게 자라고, 다음에는 기쁘며, 그 다음에는 빈번해지고, 그리고는 습관적이 되며, 그다음에는 만성적인 된다. 그리고는 개선의 여지없이 더욱 완고해지고, 다음에는 더욱 완강해지며, 결코 돌이키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침내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죄가 우리의 영적 감각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무디게 만들어 가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습관적, 만성적인 죄의 성품은 점차 자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선지자를 죽이기까지 악행도 일삼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선지자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서는 가장 비싼 값이 필요해졌습니다.

   우리를 대속할 값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뿐입니다. 예수님은인류의 대속만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확증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예루살렘을 두 번 부르신 주님이 오늘 나의 이름도 탄식 가운데 부르십니다. 애절한 사랑의 목소리 앞으로 나아갈수록 주님의 은총이 더 크게 다가오는 오늘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25() / 17 / 13:31-35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을 다시 십자가로 내모는 나의 심각한 죄는 무엇인가요?

로버트 라이턴은죄는 처음에는 즐겁고, 다음에는 쉽게 자라고, 다음에는 기쁘며, 그 다음에는 빈번해지고, 그리고는 습관적이 되며, 그다음에는 만성적인 된다. 그리고는 개선의 여지없이 더욱 완고해지고, 다음에는 더욱 완강해지며, 결코 돌이키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침내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죄가 우리의 영적 감각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무디게 만들어 가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습관적, 만성적인 죄의 성품은 점차 자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선지자를 죽이기까지 악행도 일삼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선지자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서는 가장 비싼 값이 필요해졌습니다.

우리를 대속할 값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뿐입니다. 예수님은인류의 대속만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확증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예루살렘을 두 번 부르신 주님이 오늘 나의 이름도 탄식 가운데 부르십니다. 애절한 사랑의 목소리 앞으로 나아갈수록 주님의 은총이 더 크게 다가오는 오늘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26() / 18 / 14:7-14 / 끝자리에 앉으라

낮은 자리에 앉았는데, 오히려 나를 높은 자리로 안내한다면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까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들 앞에서 친히 수종병자를 고쳐 보내셨습니다(41:1-6). 율법보다 높은 자리보다 생명 살리는 일이 소중한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에수님은 그들의 높은 자리 택함을 보셨고,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을 때 낮은 자리에 앉을 것과 잔치에 초청해야 할 이들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중앙 자리,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삶은 내려가야 높아지고, 비천한 곳을 찾아가야 귀해지고, 죽어야 다시 사는 역설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낮은 곳으로 성육신하시고, 공생애 기간에도 종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십자가를 지는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가 그분을 주라 시인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2:7-11). 우리의 끝자리는 어디입니까? 낮은 궂은 자리, 죽는 자리에 먼저 갑시다. 헐벗고 어려운 이웃에게 주의 사랑을 전합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비밀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327() / 19 / 14:15-24 / 초대받은 자와 참여하는 자

나의 처지와 형편에 불문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나요?

야구 경기를 보면 선발로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팀에 중요한 기회가 왔을 때 선발선수를 대신해서 대주자로, 대수비로, 혹은 대타로 나가는 선수가 있습니다. 대신 들어간 선수가 기회를 살려 승리로 이끌어 주전 자리를 꿰차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중에도 감독의 원래 구상과 다르게 대타로 캐스팅되었다가 인기를 크게 얻게 된 배우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에도 이와 비슷한 기회에 큰 기쁨을 얻게 된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잔치의 위상에 걸맞는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밭을 샀으매,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장가들었으니 등 각각의 형편 때문에 초청에 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충분히 양해가 되는 이유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노하여 가난한 사람, 몸 불편한 사람, 시각장애인과 저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자리를 채우가 했습니다.

   복음을 들고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그 부름에 누구나 다 응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초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할 때 성취되는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한 복을 맛보고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 기쁨을 누구에게 나누겠습니까? 주님의 초청에 함께 참여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28() / 20 / 14:25-33 / 제자의 길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있나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을 미워하기까지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것을 그대로 가진 채 주님을 더하여 섬기는 삶이 결단코 아닙니다.‘예수 그리스도라는 귀한 이름을 얻기 위하여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 명예, 권력과 같은 정욕과 욕심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자매, 심지어 목숨조차도 십자가 앞에서는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자가 공사비용을 계산하고 시작하듯이, 임금이 전쟁에 나갈 때 병력을 미리 점검하여 준비하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병이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또한 우선순위를 재정비해야 하겠습니다. 이 위대한 계획 속에 들어가기 전 내 삶을 깊이 살펴보고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선언한 후 능히 그 길을 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 부끄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고귀한 길을 선택하고, 끝까지 제자의 길을 완주하는 십자가의 군사로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329() / 21 / 15:1-7 / 잃어버린 양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죄인의 자리와 회개할 필요가 없어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의인의 자리, 이 둘 중에 우리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주님은 우리를 귀히 여기십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는 우리의 가치는 단순히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절대유일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잃을 때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은 것보다 더 슬퍼하시고 아파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려 했으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수군거리고, 다른 사람을 주저 없이 비난했습니다. 여러 가지 율법과 효율성을 따지며 주님을 공격했습니다. 반면, 세리와 죄인들은 주님과 함께 있지 못할 죄인이라는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이겨내고 언제나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회개할 것 없는자칭 의로운 양들에게 비난을 당하면서도,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사랑스러운 눈빛에 반응했습니다. 주님은 그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내시고즐거워 어깨에 메시며하나님과 천사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매신 주님의 어깨에 우리도 들려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수지 않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고 찾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30() / 22 / 15:8-10 /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것을 애타게 찾은 적이 있나요? 그때 심정은 어떠했나요?

한 드라크마는 품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 열 개의 드라크마를 줄에 꿰어 결혼반지와 같은 의미로 신부의 아버지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에게 있어서 이 열 드라크마는 자신의 몸값이며, 동시에 신랑과의 사랑의 언약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한 드라크마라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지참금의 1/10을 잃어버린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드라크마로는 절대 원래의 가치를 회복할 수 없기에 그 하나를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 신부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를 극진히 아끼시며 소중히 여기시고,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듯이우리를 끝까지 찾으십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 여기는 세상 풍조와 달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소중한 존재로 끝까지 찾으시고 함께하십니다.‘너 아니어도 돼라고 말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갈 길 잃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주님은네가 아니면 안 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언행을 통해 그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31(주일) / 사순절 네 번째 주일 / 손양원(1902-1950)의 순종

손양원 목사는 기독교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사로잡아 하나가 되게 하는 것,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십자가에 대해 어그러진 생각을 버릴 것을 전했다.

   그는 신사참배 강요에 갖은 고문과 오랜 옥고를 치렀지만 순수한 신앙을 지켰다. 194810월 애양원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던 시각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으로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며 기록한 아홉 가지의 감사문 중에는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시니 감사.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더욱 감사. (7)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9)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라는 고백이 담겨 있다. 그 중 일곱 번째 감사는 인간으로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이기고 난 후에 나온 고백이기에 그는사랑의 원자탄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다 모든 것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복종이다.

41() / 23 / 16:1-13 /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

영원히 거할 처소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마음대로 부리려 합니다. 세상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을 때 우리를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거할 처소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 아무리 친구가 많아도 그들 또한 우리를 영원히 거할 처소로 안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거할 처소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자와 청지기 이야기로 제자들에게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으나 그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낭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주인은 청지기를 꾸짖었고, 그 말을 들은 청지기는 자신의 내일을 위해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은 이 옳지 낳는 청지기가 나중을 위해 지혜롭게 대처한 것을 보고 오히려 칭찬하였습니다.

   주인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불의한 재물, 곧 이 세상에서 살 때 이 세상의 것들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들을 주인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삼아 지혜롭게 살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거할 처소로 인도하실 주님을 믿고, 주님 나라의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42() / 24 / 16:19-31 / 부자와 나사로

이 땅에서 받는 것과 하나님의 품에서 받게 될 것 중에 무엇을 더 사모하십니까?

주님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누릴 것이 없었던 나사로를 보셨고, 오늘 나사로처럼 주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우리를 보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렸던 부자를 보셨고, 오늘 이기심에 사로잡혀 남의 아픔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우리를 보십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그리도 하나님도 부자를 향하여얘야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이 땅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극심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뎌야 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품안에 더욱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개들이 헌 데를 핥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으로 느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대로 영원한 사람의 품에 그를 안아 주셨습니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의 잣대로 볼 때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해도 슬퍼하지 않는 것 극심한 고난을 오직 하나님의 품에 내어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3() / 25 / 17:1-10 /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생명력 있는 믿음이 공동체 안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죄를 짓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 공동체와 관련이 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비유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의 이 일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입니다. 그 한 알만큼의 작은 믿음에는 분명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와 용서가 공동체 안에서 계속 반복될 때, 주를 향한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지체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종국에 완성해 가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사람의 주님을 믿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사는 공동체, 그것이 사명임을 기억하고 끝까지 무익한 종의 자리를 지키는 자들, 바로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내가 속한 공동체를 세워 가는 여정을 들여다보고 아름답게 이루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44() / 26 / 17:11-19 /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나는 어떤 감사의 제목이 있나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부는 현상은 자연의 일반적인 현상이고 그 혜택은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과 모든 만물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나 그 비나 바람, 또는 한 줌 햇볕에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범을 보인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 선행을 베푼 이도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즉각적인 감사를 표현한 사람도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훌륭한 점은 예수님께돌아와서찬양을 드렸고, 예수님께감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열 명의 병자들이 제사장에게가다가깨끗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 열 명 중 아홉 명이 제사장들에게 가서 정결의 선언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직접 돌아와 감사한 자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치유와 구원의 선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먼저 깨닫고, 예수님께로 직접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본문의 한 사람처럼 온전한 치유와 구원의 자유가 우리 인생을 더욱 새롭게 할 것입니다.

 

45() / 27 / 18:1-8 / 과부와 재판관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매달려 간구해도 될까요?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얼마나 간절한 믿음과 신뢰 가운데 기도해야 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곤궁에 처한 과부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장에 관한 비유는 기도하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재판장을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재판장이라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의한 자였습니다. 불의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부는 그를 찾고 또 찾아와야 했습니다. 재판장은 그 과부의 억울함과 곤고함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하물며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주님,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 곤궁에 처했을 때 낙심하지 말고 더더욱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자녀 된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필요를 아시며,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고, 너무나 소중한 권리이자 복이 아니겠습니까?

 

46() / 28 / 18:9-14 / 두 사람의 기도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고 계심을 언제 느끼나요?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업적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업적은 실제로 대단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윤리적으로 바르고 경건하며 금식과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불손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기 죄를 고백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인정을 받고 기뻐하심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며 자기 자신에게 만족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기를 낮춤으로 겸허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가장 낮은 자를 체휼하신 주님을 묵상하는 사순절, 나를 낮춤으로 타인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여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47(주일) /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 남궁억의 무궁화 사랑

남궁억 지사는 배재학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무궁화로 자수를 수놓은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기를 가정에 보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었다. 남 자사는 무궁화를 주제로 한 노래도 지어 배재학당 학생들로 하여금 방학식 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 노래 1절은 다음과 같다.“성재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후렴은 애국가와 같다.

   남궁억은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에 모곡학교를 세우고 무궁화 묘목을 키워 분양하고 학교의 재원으로 쓰는 한편, 삼천리 강산에 무궁화를 심기 위한 프로젝트를 70세 누구를 이끌고도 실현했다. 그는 1933117일 일본경찰의 신문조서에 무궁화를 심고 보급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무궁화는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국화이므로 그 꽃을 많이 보급시켜 놓으면 민족적 감정이 달라질 것은 이치의 당연이므로 그 목적 아래 재배하여 보급한 것은 사실이다.”

 

48() / 29 / 18:18-27 /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길로 구원 얻을 방법이 있을까요?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영원한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부자이면서 관리였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부자 관리를 청년이라 하고, 마가복음에는 주님이 이 청년 부자를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 관리인 청년에게 예수님은 질문하시고, 명령하시면서 구원을 얻는 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율법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킴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철저히 잘 지킨 후에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먼저 율법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사람의 구원의 시작점과 마침점 모두 예수님만을 주로 신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맥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의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만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부요함도, 율법을 다 지키는 것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임을 기억하며 오직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49() / 30 / 18:28-30 /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버렸나요?

가끔씩 집안을 정리하다 보면 쓸모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책이나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버리기에는 아깝고, 안 버리자니 불편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하는 것들과 또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여겨 버리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지니고 있는 불순종의 잔재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버려야 할 것들이 다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 입니까? 세상을 거슬러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가 헌신적인 결단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며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때 영원히 누리게 될 복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삶이란버림으로써얻게 되는 삶입니다. 나는 영생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410() / 31 / 18:31-34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나의 마음과 영적인 눈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나요?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거듭 이야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도 아직까지 고난과 죽음 사건은 믿기기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여전히 많은 부분 비밀로 가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렌즈를 가지고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사람들 중 그 어떤 사람도 구약 성경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예언을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때까지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었고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잡게 될 때,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입으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염려와 죄악에 물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의 뜻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달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무지하여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감추어졌던 말씀을 밝히 알게 되는 기쁨과 감격, 그 은혜가 내게서 가정과 이웃과 직정으로 흘러 넘치게 되길 바랍니다.

 

411() / 32 / 18:35-43 /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내가 지금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외치는 외침은 무엇인가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멸시와 고통을 당한 사람이나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외침의 한 형식입니다.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이 외침(기도)은 깊은 영혼의 아픔과 고통, 외로움과 소외가 뒤섞인 한 인간의 구언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만 외친 것이 아니라 두 번씩 외쳤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방향인지도 모른 채 허공에 대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 외침은 이내 사람들로 인해 제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제재는 그의 간절함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너무나 좋은 기도입니다. 짧지만 이 외침 속에 우리의 간구와 소원과 감사와 고백을 모두 담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이 외침과 더불어 대표적인 기도의 모범을 우리는 세리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길지 않습니다. 간결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자세와 방법은 기도 내용과 조화를 이룹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나에게도 이러한 마음과 자세와 간절함이 있습니까? 세상이 나를 억누르고 제압하려 할 때 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께 고백할 간절함이 뿜어져 나오길 소망합니다.

 

412() / 33 / 19:1-10 /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감격을 가지고 있나요?

사람들은 누구나 이긴 팀에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또 내가 속한 공동체가 최고의 모임이길 바랍니다. 그런데 인생의 승리, 최고의 인생은 예수님 안에 다 있습니다. 처음 삭개오는 예수님 밖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예수님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소속이 바뀌었고, 신분이 달라졌으며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의 첫 고백이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 예수님은 삭개오의 고백에서 그가 참으로 회개했음을 확인하시고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삭개오 개인의 고백이었으나 그의 집도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에 신속히 따랐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생명의 길을 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죄인으로 배척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새 이스라엘의 일원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삭개오를 살리신 예수님의 구원의 사랑이 오늘 나와 우리를 통해 온 세상에 선포되길 원합니다.

413() / 34 / 19;11-27 / 열 므나의 비유

나는 하나님이 맡기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을까요?

영적인 깊이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작은 것, 하찮게 보던 것을 소중하게 보고 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상 종에게 맡겨진 한 므나는 20데나리온입니다. 이것은 한 노동자가 20일을 일해서 받는 품삯 정도의 액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보상은 열 개의 마을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인데, 그 보상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클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는 권세가 주어질 것입니다(22:5). ,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이,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다섯 고을이 주어진 사실을 통해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후 9:6).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복은 성도들이 기울인 노력을 합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며 주인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때에 주님이 반드시 오셔서 심판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 칭찬받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그 충성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커져 갈 것입니다.

 

414(주일) / 종려 주일 / 종로에서 온몸으로 홀로 독립을 외친 김상옥(1890-1923)

1:400. 1923122일 동대문 근처 종로에서 김상옥을 잡으려고 일본경찰 400명이 이혜수의 집을 에워싸고 총격전을 벌였다. 일설에는 김상옥을 체포하기 위해 1,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하지만 일본경찰이 축소하여 발표한 숫자이다. 적을 쓰러뜨리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총알을 관자놀이에 대고 자결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결할지언정 일본경찰에 투항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사는 진정한 자유인을 꿈꾸며 동대문감리교회에 출석하며 이필주 목사의 후원으로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청년부장을 역임했다.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서 생필품을 생산 판매하였으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동업 조합을 설립하였다.

  김상옥 지사가 추구한 독립 세상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었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런 그는 19193.1운동 직후부터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혁신단을 결성하고 혁신공보를 펴냈다. 암살단을 조직하여 총독과 고위관리 암살작전을 세웠지만 실패하여 상해로 떠났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제하고 의열단에 들어가서 국내 암살작전을 계획하여 실패하였다. 1923112일에는 독립지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일제의 심장부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 사건은 드라마각시탈로 재판생한 바 있으며, 이분의 독립 정신을 기념하여김상옥 도로로 도로명을 정하고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을 세웠다.

 

415() / 35 / 19:45-48 / 기도하는 집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디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44)는 참담한 예언의 말씀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시고 강도의 소굴로 변해 버린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먹이 사슬처럼 엮여 있던 당시 기득권자들은 이날 후로 예수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굳어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가슴 절절한 음성을 듣습니다.“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이는 오래전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었습니다.“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56:7). 결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욕심 많은 도둑들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을 행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는 나의 이득을 취하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고통과 아픔을 품고 찾아올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단번에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이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416() / 36 / 20:9-19 / 포도원 농부

포도원 주인의 뜻을 거스르고 욕심껏 살아간 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마치 마지막 기회인 듯 하시고 싶은 말, 하시고 싶은 행동을 다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내 쫓으신 행동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미움을 사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에게 와서 항의하는 이들을 향해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권위를 갖고 말씀하십니다.

소작농밖에 되지 않는 포도원 농부들이 포도원을 욕심내서 포도원 농부의 뜻을 어기고 그가 보낸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이고 그 상속분을 빼앗아 버리는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그들에게 하셨지만 사실은그들에 대해서 하신이야기입니다. 바로 당신들이 탐욕에 가득 차 포도원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바로 그 악한 자들이라는 지적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권위가 추락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사람의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데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목회자의 타락과 욕심으로 인해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시 교회를 주인께 돌려 드리고 신실하고 진실된 포도원 농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와 욕심을 돌아보며 참회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417() / 37 / 20:41-44 /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나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 포도나무, 선한 목자 등 여러 비유로 소개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선생으로, 주님으로, 그리고 메시야(그리스도)로 불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 가지로 정형화되기 어렵고 그분의 사역 또한 매우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있는 마태복음 22:41-46을 보면 에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고, 그들은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나는 다윗의 자손이라 말하는데 그 말은 적절하지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 아닌 다윗의 주 이기 때문이다.”어쩌면 어떤 호칭으로 부르는가 보다 그 호칭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알고 부르는 가가 더 중요한 문제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자로 한정 지었던 유대인의 잘못된 이해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신 메시야, 그분이 나의 주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고, 온 세상에 나아가 전하고, 그분의 뒤를 따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참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18() / 38 / 22:14-23 / 마지막 만찬

성만찬 예식에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유월절 식사 중에 예수님은 여느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이 식사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 말씀하시며 이제 나와 함께하지 못한다 하여도 이 떡을 내 몸이라 여기고 이 잔을 내 피라 여기며, 늘 나와 함께했던 날들을 기억하라 부탁하십니다. 이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내어 언약 백성답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라는 진심을 담은 식탁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독교 전통은 고난주간 목요일 저녁에 성만찬을 향해 왔습니다.‘세족례 목요일이라고 불렸고 또 기억해야 할 식사를 갖는 소중한 날입니다. 성겨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식사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 매우 소중한 경험입니다. 해질녘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주님, 그리고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와 함께 식탁을 나누신 주님, 갈릴리 호숫가로 돌아가 다시 고기를 낚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손수 음식을 지어 먹이신 주님은 성만찬 예식을 통해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의 마지막 식탁은 그분을 기억하는 이들을 통해서 여전히 새롭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식으로 배부름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식탁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그 사랑의 식탁에 초대할 이를 생각하며, 그들을 섬기고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하겠습니다.

 

419() / 39 / 23:44-49 /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예수님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빛으로 오신 분의 마지막을 배웅하듯, 해도 빛을 잃고 온 땅은 칠흑같이 어두워졌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흔치 않은 징조들이 메시야의 죽음을 암시해주었습니다.“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은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나 분노나 절망의 외침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이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신뢰입니다. 그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한 지휘관의 고백은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였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서뿐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도 모든 이들에게 선한 삶의 길을 보여 주시고 참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분을 그토록 부인했던 이들의 입이 그분을 그리스도라 인정하게 하고, 그분과 함께 죽어 가던 한 죄인은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그리고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요 진정한 의인이셨습니다.

   성 금요일. 나를 위한 주님의 죽으심에 담긴 뜻을 깊이 새기며 우리가 가는 믿음의 여정을 돌아봅시다. 우리의 삶이 그 누군가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복된 길이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내 삶에서 순간순간 느껴지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19 대림절의 깊은 묵상 임현희 2019.11.30 0 1398
다음글 제48회 특별새벽집회 운영자 2019.01.06 0 1081

561203 TEL : 063-211-4475 지도보기

Copyright © 전주팔복산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