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어머니는 대가족을 위한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모두 마치시고서야 성전을 향하셨다. 어린 아들의 마음에도 ‘우리 엄마는 참 고단하시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고사리 같은 손이라도 보태려 어른들 눈을 피해 몇 번이고 주방에 잠입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불호령에 화들짝 놀라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곤 했다.
초저녁부터 성전에 오르시는 길, 비록 육신은 고단하셨을지라도 영혼만큼은 가장 편안한 안식을 누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신 아버지의 목회를 위해, 그리고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들을 주시면 목회자로 바치겠다” 서원하며 낳은 이 아들과 가족을 위해, 새벽기도회의 인기척이 들릴 때까지 깨어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시면 꼭 나의 머리맡에서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자는 척 누워 있었지만, 선명하게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는 “우리 아들 현희”라는 이름이 수십 번도 더 반복되었다. 그렇게 기도의 들숨과 날숨으로 하루를 엮어가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마지막 선물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육성으로 남기신 채 기도로 빚어낸 세 아들 목사를 뒤로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역대하 6:20)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허전함을 가슴에 안고 어머니의 온기가 가장 많이 머물던 주방을 휙 둘러보았다. 그곳엔 어머니의 체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젖은 눈을 훔치며 나오려는데, 수저통에 가지런히 꽂힌 숟가락들 사이로 유독 귀퉁이가 닳아진 숟가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니 어린 시절 가마솥에서 밥을 짓고 누룽지를 긁어 아들 손에 쥐여주실 때 보았던 바로 그 숟가락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달챙이 숟가락’이라 부르셨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 숟가락을 감싸 쥐니, 억척스럽고 투박했던 엄마의 손과 따뜻하고 포근했던 엄마의 손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기 3:11)
‘달챙이 숟가락’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 방언으로, ‘닳아서 작아진 숟가락’을 뜻한다. 경상도에서는 ‘쪼매난 숟갈’ 혹은 ‘소지랑 숟갈’, 강원도에서는 ‘닳개 숟가락’이라 부르기도 한다. 표준어로는 닳아서 끝이 뭉툭해진 물건을 통칭하는 ‘모지랑이’를 써서 ‘모지랑이 숟가락’이라 부르는데, 방언임에도 불구하고 문학 작품 등에서 고유명사처럼 애틋하게 쓰이곤 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한쪽 귀퉁이가 초승달처럼 오목하게 패어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본래 둥글고 예뻤을 숟가락이 그토록 닳기까지는 누룽지를 긁어낼 때나, 어머니의 비녀 노릇을 할 때나, 때로는 문고리의 잠금장치가 되어줄 때 등 주인의 부름에 온갖 궂은일을 마다치 않고 제 몸을 희생했기 때문이리라.
어머니의 유품인 성경책과 함께 달챙이 숟가락을 챙겨 나오는데, 문득 18세기 영국의 대각성 운동을 이끈 설교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명언이 떠올랐다.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낫다(I would rather burn out than rust out).”
만일 이 ‘달챙이 숟가락’이 조지 휫필드를 만났다면, “내 신념을 몸소 실천하며 그 가치를 증명하였구나”라는 큰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녹슬어 사라지지만, 헌신과 열정 그리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곳에 나를 내어드리면 비록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아도 그 뒤안길에는 헌신의 열매가 남는다. 열정의 불꽃은 타오르고, 또 다른 ‘달챙이 숟가락’을 길러내는 귀감이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그날 이후 나는 양복 안쪽 주머니에 만년필과 함께 ‘달챙이 숟가락’을 꼭 넣고 다닌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성도들에게 사랑받는 목사가 되라”며 평생 기도하고 격려해 주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또한 오늘 이 순간, 하나님 앞에서 녹슬지 않고 기꺼이 닳아지는 삶을 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에베소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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