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사순절 ‘좁은 길로 걷는 기쁨’
이번 사순절에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마가복음은‘길’을 중요하게 여깁니다.‘길’이라는 말은 마가복음에 16번이나 나옵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길 위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인에게 길은‘신앙의 여정’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만난 주님을 주로 고백하고, 이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의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신 하늘 길, 하나님 나라의 길을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그 길에서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고백하고, 주님과 만나 함께 걷게 될 내일의 여정에 약속과 다짐이 있는 사순절을 보내 봅시다.‘좁은 길로 걷는 기쁨’에 함께 동참하시겠습니까?
▣ 2월14일(수) / 제1일 / 막1:1-8 / 복음으로 길을 열고
☞ 내가 가는 길에 주님이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회심과 회개로 시작됩니다. 내 자신의 모습과도 같은 재를 이마와 손등에 바르며 주님이 계시지 않는 나는 흙이요, 먼지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걸어온 그 삶의 여정에 주님이 계시는지 조용히 가다듬어 보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더불어 주님이 복음으로 열고 담대한 믿음과 지치지 않는 영성으로 걸어가신 그 좁은 길을 나도 함께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검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선언합니다.“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새로운 길입니다. 평화와 사랑을 통해 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새 길은 세상의 권력이 집약된 로마제국의 전쟁과 정복을 위한 길을 대치하는 길입니다. 또한 이 길은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참된 구원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와 이루어 가는 새로운 나라를 향한 복음의 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재의 수요일,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복음의 참된 길에 참여합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절제와 성찰의 시간을 쌓아 가야겠습니다.
▣ 2월15일(목) / 제2일 / 막1:9-11 / 하늘 길이 땅으로
☞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나요?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마가는 간결하게 보여 주지만, 그 의미가 결코 간단하지는 않습니다.“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며 하늘이 땅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길이 열림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같이 내려오신 성령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노아의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비둘기는 이제 문을 열고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마가는 비둘기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납니다.“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이 음성은 예수님의 마음에 담겨 고난의 길을 넘어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시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때 성령께서 우리와도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닥친 고난의 길을 넘어갈 수 있도록 날마다 힘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 2월16일(금) / 제3일 / 막 1:12-15 /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있다
☞ 내 삶에 놓여진‘광야’는 어디인가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받으신 세례는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아름다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이야기 끝에 마치 따뜻한 봄날 정원에 우박이 내리는 듯한 반전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곧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을 허허벌판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기쁨과 감격의 시간을 지나 광야의 거친 벌판에 홀로 서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자비한 세상에 맞서서 진리와 구원의 복음으로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영적 전쟁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전쟁을 온전한 승리로 마치십니다. 들짐승이 우글대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사자가 그와 함께 하시며 끝까지 주님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 말씀은 느슨하고 안일한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거룩한 행진에 함께 참여하라고 도전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외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로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 2월17일(토) / 제4일 / 막 1:16-20 / 나와 함께 가자
☞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나요?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던 예수님은 시몬(베드로)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갈릴리의 일상적 풍경이었지만, 당시 포악한 왕 헤롯과 로마의 식민지 억압, 헤어날 수 없는 가난한 꿈꿀 수 없는 절망감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거친 광야와 같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들린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과 나라를 꿈꿀 수 있게 했습니다.“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삶이 힘겹다고는 해도 비교적 익숙하고 안전한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고 주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한 그분과 함께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을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결기가 느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셨습니까? 그 응답 속에 새로운 다짐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까? 좁지만 기쁜 그 길을 주님과 함께 오늘도 걸어가겠습니다.
▣ 2월19일(월) / 제5일 / 막 1:35-39 / 가까운 마을로 가자
☞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가다리는 자리에 있나요?
아직 날이 밝기 전,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셨습니다. 에수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 이어 가셨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되새기셨습니다. 시몬과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모든 사람이 주님을 찾는 다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고 하시며 자신은 전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전도하셨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있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 전파를 최우선의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전도는 단순히 교회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을로 다니면서 각자의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는지 알려 주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원하고, 느끼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겠습니다.
▣ 2월20일(화) / 제6일 / 막 1:40-45 / 측은히 여기는 마음
☞“어려운 이웃들을 바라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나요?”
한 한센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당시 한센병은 부정한 병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 병에 걸리면 건강한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자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 계시던 예수님을 가까이 찾아와“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며 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에게 직접 손을 대시고“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에는 죄인을 온전하게 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에서 깨끗함을 얻기 원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엎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악한 자와 병자를 있는 모습 그대로 맞이하셨고, 그들은 모든 올무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그날을 떠올려 봅시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 주셨으며,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기뻐했던 그 자리에 다시 서 봅시다. 그리고 그 은혜와 감격으로 주변을 돌아봅시다. 혹 우리가 정죄하고, 죄를 당연시한 것은 아닌지요? 외면한 자들, 포기한 자들이 있다면 다시 마음에 품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겠습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며 측은히 여기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해 봅시다.
▣ 2월21일(수) / 제7일 / 막 2:1-12 / 네 상을 들고 가라
☞“어려운 문제로 힘겨워하는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에게서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고귀한 사랑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병든 친구를 위해 책임 있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도울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말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셋째, 나에게 있는 능력으로 친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넷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 줄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도와 줄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불붙듯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좋은 만남은 또 다른 좋은 만남을 낳습니다. 중풍병자는 친구들 덕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무기력한 인생에 생명이 더해졌습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만 받는 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돕고 살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는 육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의 문제까지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최상의 선행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용기를 내어 이웃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해야겠습니다.
▣ 2월22일(목) / 제8일 / 막 2:13-17 / 죄인도 함께 걷는 복음의 길
☞“이웃을 정죄하며 거리꼈던 적이 있나요?”
당시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여겨져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손수 찾아가 만나 주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레위 집으로 가셔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친밀감과 종교적인 교재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바리새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에 의도적으로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의 기준은‘의’입니다. 하나님께서‘의’의 기준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은 율법입니다. 그런데‘의’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롬 3;10).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으며,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 죄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자기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의의 길, 복음의 길에 주님이 나를 초대하셨습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면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듯이 그 누구도 주님의 손길에서 제외되는 대상은 없습니다.
▣ 2월23일(금) / 제9일 / 막 2:18-22 / 새 길을 향한 새로운 자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나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정한 방식대로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는 표현으로 금식을 했는데, 금식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대표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금식을 요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이 오셨으니 이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이스라엘에게 영광의 시대를 열어 줄 다윗과 같은 왕을 기다리는 메시야 대망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금식을 통해 이스라엘이 당한 슬픔을 표현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원할 왕을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뤄진 새 시대는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고, 주님이 주신 것들을 향유하면 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태도,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옛 시대의 생각과 삶의 태도는 새 시대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 기쁨 가운데 순례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 2월24일(토) / 제10일 / 막 2:23-28 /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고 있나요?”
안식일에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며 이삭을 자르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따졌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윗인 진설병을 먹었던 예를 드셨습니다. 진설병 규례가 엄격한 것이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던 다윗과 그의 일행을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다윗은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높임 받는 위대한 왕이지만 단지 예수님의 모형일 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안식일 규정이 지향하는 참된 안식을 실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에수님은 무엇보다, 성전보다, 율법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주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식일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창조를 기념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보내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면 사람들이 그분의 안식을 얻도록 돕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복음을 분명하고도 풍성하게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 2월26일(월) / 제11일 / 막 3:13-19 / 복음의 길에 함께할 이들
☞ “단순하게 하나님을 따르고 있나요?”
현대인들은 정보와 사회의 복잡다단한 구조 속에서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만을 표현했을 때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생각 아래‘최소한주의’즉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선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삶의 가치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가치를 따라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7-9에서 예수님은 여행을 위해 지팡이 외에 다른 것을 가지지 말고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고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여 경험한 것은 단지 검소한 삶이 가져다주는 유익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행복과 성공의 가치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삶을 살라고 초대받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행했고,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지려고 하고 있자는 않습니까? 무엇인가를 소유해야만 행복해진다는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오늘도 미니멀리스트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귀한 가치를 향한 복음의 미니멀리스트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 2월27일(화) / 제12일 / 막 3:31-35 /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깨달아질 때는 언제인가요?”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는 파리 근교 벨빌이라는 곳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상처받은 노동자들, 힘없는 어머니들과 굶주린 아이들, 떠돌아다니는 자들을 매일같이 접하면서 성장한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결합되면서 그의 예술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감으로 삶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각자의 그림이 하나의 퍼즐조각이 되어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예수님은 행함의 근원을 하나님의 뜻에 두는 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이룬 공동체를 힘써 지키고 있습니까?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 2월28일(수) / 제13일 / 막 4:26-32 / 씨앗처럼 자라는 하나님 나라
☞“믿음 가운데 열매 맺었던 경험이 있나요?”
중국 항저우에는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용정차를 생산하는 곳이 있습니다. 용정차는 여린 새순만을 채취해 몇 차례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만드는데, 그 맛이 구수하면서도 향기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 중 옛날부터 황제에게만 바치는 차를 생산하는 나무를 어차수라고 했는데, 놀라운 것은 어차수에서 생산된 용정차의 경매가가 수억 원을 호가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녹차 씨앗 한 알 가격이 약 100원 정도 하는데, 어차수에서 난 용정차가 고가인 것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어차수도 작은 하나의 씨앗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황제에게 바치는 차를 생산하는 나무가 되었을 때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그 씨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밭에 심겨질 때 이들에게서 엄청난 가치의 열매를 수확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물질로 다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내 안에 있는 작은 믿음과 말씀의 씨앗으로부터 자라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에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말씀의 씨앗이 틔워 넓은 그늘을 가진 든든한 나무로 자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삶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 3월1일(목) / 제14일 / 막 4:35-41 /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께서 새 힘을 주실 때는 언제인가요?”
인생을 살다 보면 강풍이 몰아치는 폭풍처럼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갑작스레 밀려온 폭풍 앞에서 헤쳐 나가려고 몸부림치며 여러 방법들을 찾지만, 이내 두려움과 절망에 함몰되기도 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큰 풍랑을 만나 배에 물이 가득 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셔도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죽음의 위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큰 풍랑 중에도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고 풍랑의 시련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불치병과 같은 큰 문제들도 있지만, 소화불량, 불안, 숙면 방해 등 소소한 질병들에도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낙망하거나 좌절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심을 잊고 당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 가운데 함께하시며 역사하십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믿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 봅시다. 우리 곁에 늘 계시는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삶에 항상 있는 크고 작은 풍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잠잠하라, 고요하라.”
▣ 3월2일(금) / 제15일 / 막 5:1-20 /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나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집’이라는 건축물은 철저히 이성적인 설계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만약 오차가 있다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집’은 따뜻한 정서적 공간입니다.‘가정으로서 집’이 없다면 살아 있다는 가슴 따뜻한 의미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더불어‘집’은 우리의 현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루의 삶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집은 인간 존재의 희로애락의 근원지입니다. 사람은 집을 통해 안정을 찾고, 힘을 얻고, 회복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결국‘집’이란 한 사람의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어우러지는 그 자신의 실존에 큰 영향을 주는 곳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삶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 속에 예수님을 따르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집으로 돌아가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사는 모습을 제자들에게서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들의 집이 변화된 것입니다. 신앙의 모습은 교회에서만 보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장, 즉 집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집이 예수님으로 인해 안정을 찾고, 힘을 얻고, 회복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믿음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 3월3일(토) / 제16일 / 막 5:25-34 / 부정을 정결하게 하시고
☞“깨끗함이란 무엇일까요?”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지났습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교회의 부정을 비판하며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반박문을 붙인 후 토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면죄부 판매로 인해 모든 기독교 세계의 돈이 이 밑 빠진 교회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가꿔야 할 것은 지역 교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교황은 모든 교회에 면죄부를 허락하는 것보다 한 교회라도 선한 목자를 임명해야 옳습니다. 교황의 면죄로는 죄책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면죄로 하나님과 화해된다고 말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를 받지 않아도 죄책과 처벌을 완전히 감면받습니다. 교황이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땅에서 부과해 놓은 처벌뿐입니다.”
복음은 구약의 정결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법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을 통하여 병(부정)으로부터 벗어나 건강(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5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날마다 믿음의 개혁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개혁이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으로부터 정결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그러한 우리를 향하여 주님을 말씀하십니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부정)에서 놓여 건강(정결)할지어다.”
▣ 3월5일(월) / 제17일 / 막 6:1-6 /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시고
☞“내 지식이나 판단에 갇혀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나요?”
고향으로 돌아간 예수님이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움도 잠시, 곧 쉽게 바뀌지 않는 자신의 지식과 판단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여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막 6:3)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에 갇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온전히 아는 데 큰 장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의 함정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믿음’입니다. 내 생각과 지식과 경험의 장벽을 뛰어넘게 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곧 십자가의 길로 가시면서 주신 은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이 주님을 믿는 데 방해가 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또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3월6일(화) / 제18일 / 막 6:14-29 /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삶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 걷고 있나요?”
예수님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길로 가셨습니다.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이 아니면 생명을 구해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죽음을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길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가시는 이 길을 준비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보다 앞서서 목 베임을 당한 광야의 소리입니다. 그는 주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위해 앞서 준비된 자였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0,14).
아무도 가지 않는 길, 희생의 길에 세례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할 일을 다 이루었을 때,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예표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은 결국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부활의 영광뿐 아니라 처절한 고난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 3월7일(수) / 제19일 / 막 6:30-44 /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주님 앞에서 작은 것과 큰 것은 각각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인생은 B-C-D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태어남(Birth-B)과 죽음(Death-D) 사이에 살면서 끊임없는 선택(Choice-C)을 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택하는 길에는 하나님의 선택과 다른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른바 사람이 즐겨 선택하는 것에는 큰 것, 많은 것, 돈이 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뭄이 깊어 갈 때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머물게 하셨던 안식처는 다른 아닌, 마지막 남은 식량을 먹고 죽으려고 했던 사르밧 동네의 한 가난한 과부의 집이었습니다(왕상 17:1-10). 거기서 마르지 않는 은혜를 경험케 하셨습니다.
여기 해가 저문 저녁, 빈들에서 제자들의 귀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무리들에게 사서 먹일 양식을 위한 비용을 계산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7절). 곧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 제자들이 찾아낸 것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지극히 작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눈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작은 것이 작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보지 못한 길,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닌 길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셨습니다.
▣ 3월8일(목) / 제20일 / 막 7:1-23 / 무엇이 더러운가?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보다 밖에 보이는 더러운 것을 탓하지 않았나요?”
하루에 손을 몇 번 씻는지 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화장실에 갔을 때나 식사할 때는 물론, 그 외에도 여러 번 손을 씻으며 삽니다.
당시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시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묻기를“당신의 제자들은 어찌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과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명은 저버리고 있는 그들의 위선에 대하여 지적하셨습니다. 막상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씻어 본 적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복음전도자 무디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일입니다. 해를 등지고 걷고 있던 무디는 자기 앞에 놓인 그림자를 보았습니다.“요~그림자! 내가 잡고 말 테야.”하면서 그 그림자를 따라잡으려고 갖은 애를 써 보았지만, 여전히 그림자는 자신보다 앞질러 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해를 향하여 돌아섰을 때, 그 그림자가 자신에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햇빛을 바라보고 걸으면, 그림자를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주님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죄 된 습성을 따라갑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생각과 탐욕이 더욱 긴 그림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우리의 죄 된 습성을 버리고 빛 되신 주님을 따르고 바라며 살아가야겠습니다.
▣ 3월9일(금) / 제21일 / 막 7:24-30 / 당당한 이방 여인
☞“언제나 주님 앞에 용기 있게 나아가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으로 가셔서 한 집에 조용히 머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귀신 들린 딸을 위한 간구였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정관념과 차별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바로 그 자리가 이 이방 여인이 엎드린 자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간구는 매우 겸손하고 절실하며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그녀가 구하는 것은 빵 한 덩이나 한 조각이 아니고 단지 빵 부스러기에 불과한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심지어 개들도 주님의 상 아래에서 먹는다는 예를 들어 그녀의 간절함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 여인에게서 중요한 것을 보셨습니다. 바로 당신이 주시는 부스러기라도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임을 아는 여인의 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과 함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믿음과 기도 그리고 겸손과 인내가 함께할 때, 그 결과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이 이름 모를 여인의 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치유 받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갈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인처럼 당당하게 용기 내어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 3월10일(토) / 제22일 / 막 8:27-38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너에게 나는 누구냐?’물으신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나요?”
낡고 흠이 있는 오래된 바이올린 하나가 있었습니다. 경매하는 사람은 값싸게 보이는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소리쳤습니다.“자, 누구든지 이 헌 바이올린을 사실 분은 말씀하십시오.”“1달러요.”“예, 1달러 있습니다.”“2달러요.”“예, 2달러 좋습니다.”그때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앞으로 나와서 그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크게 감동했습니다. 연주가 끝나가 그 경매인은 말했습니다.“이제 다시 이 오래된 바이올린의 경매를 시작할까요?”그때 여기저기서 경쟁하듯 입찰 가격을 불렀습니다.“1000달러요.”“두 배는 없습니까?”“2000달러? 세 배는 없습니까”“3000달러 있습니다.”2달러에 팔릴 뻔한 먼지 묻은 바이올린이 3000달러에 팔린 것입니다. 그 오래된 바이올린을 깨워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나의 인생을 연주하는 최고의 연주자이십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로 나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이는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비로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이 가는 길과 이를 따라야 할 제자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 3월12일(월) / 제23일 / 막 9:33-37 /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
☞“나보다 약하고 어려운 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길에서 제자들이“누가 크냐?”고 서로 쟁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왜 그 문제로 열띤 토론을 하였는지 그 핵심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투는 것은 그들이 힘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그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며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세상 나라와는 다른 나라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고 안으며 말씀하셨습니다.“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세상은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약함과 실패를 이용하여 성공하고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힘 있고 강한 자들이 어린아이같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들의 약한 점, 실패한 부분들을 품어 주고 도와주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한 점, 실패한 부분들을 품고 도와주기 위해서 자신의 힘과 능력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품고, 나누고, 돌보아야 할 지체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3월13일(화) / 제24일 / 막 9:38-50 / 서로 화목하라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43절). 예수님은 매우 냉정하게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영성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50절에서는“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예로부터 소금은 금처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약속은 소금을 가지고 했습니다(레 2;13). 서로 화목하라는 것은 이처럼 변할 수 없는 소금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세계가 폭력에 물들어 타락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공동체를만들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소속감을 느낄 수 있고 뭐든지 함께 나눌 수 있으며 평화와 따스함이 가득한 곳, 굳이 나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약점까지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곳,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편견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그런 공동체, 이것은 교회에 대한 나의 비전이기도 합니다”(크리스토퍼 스미스). 서로 화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삶이야말로 교회공동체가 지녀야 할 믿음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배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입니다.
▣ 3월14일(수) / 제25일 / 막 10:17-31 /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율법이 명하는 바를 다 지켜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네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돈’문제입니다. 사람에게 돈에 관한 것만큼 어려운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가지면서부터 이 땅의 재물에 대해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귀가 아프도록 들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오늘 말씀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고 정확하게‘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말씀하십니다.“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다만 욕심을 부려 돈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돈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흙수’‘금수저’라는 신조어도 이런 가치관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돈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 세우라고 권고하십니다. 나에게도‘한 가지 부족한 것’이 돈 문제가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다시 세우는 절기가 되어야겠습니다
▣ 3월15일(목) / 제26일 / 막 10:32-45 / 낮아져야 들어가는 길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종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보살피는 책임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 리더십 유형 중‘서번트 이더십’은 팀원 모두를 하나로 엮으면서 누구나 공감하는 공동의 비전을 만들고, 그 비전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일에 구성원 각자가 지닌 고유한 능력을 기꺼이 쏟아 붓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에 서번트 리더십을 보여 주는 좋은 모델이 있는데, 바로 보아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와서 보아스의 밭에서 품앗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함께 식사자리에 앉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서 혼자 밥을 먹는 룻을 보고 같이 앉아서 식사하자고 했습니다. 아마도 보아스는 평소에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따뜻한 식탁공동체를 이루어 간 듯 보입니다. 그는 이방 여인이었던 룻을 공동체로 초대했으며, 그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풍성함과 사랑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풍성함과 사랑의 자리로 누구를 초대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지배하고 착취하는 나라가 아니라 종이 되어 섬기고 하나 됨으로 이루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 3월16일(금) / 제27일 / 막 10:46-52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지금 주님께 무엇을 간구하고 있나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죄로 가득 찬 인간임을 알고, 언제든지 현재 자신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지려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ᅟᅡᆮ. 그리고 이 과정은 사는 날 동안 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본문 앞 35-45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으뜸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디매오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간절히 외칩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바디메오는 두 번이나“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이 간절한 외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 주님을 간절히 찾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의 보좌에 주님을 모셔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3월17일(토) / 제28일 / 막 11:1-11 /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만약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화려하고 멋진 아라비아산 군마를 타고 군림하려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신 것을 시작으로, 전 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읹 보여 주셨습니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주님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예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대단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더욱 대단한 일이다.”주님이 보여 주신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예수님이 가신 거룩한 길을 신실하게 따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조용히 퍼져 나가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라 겸손하게 행하며 평화를 이루어 가야겠습니다.
▣ 3월19일(월) / 제29일 / 막 11:12-14 / 열매 없는 삶에 대한 저주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나요?”
예수님이 베다니를 떠나실 때 배가 고프셨습니다. 주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찾으셨지만, 잎만 무성할 뿐 무화과 열매는 없었습니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무화과 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유월절 즈음이니 4월 정도인데, 팔레스타인에서 무화과나무는 8월이나 9월에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의 주님이 제철이 아니기에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에게 너무 가혹한 행동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구약 성경 미가 7장에서 이 일에 관한 해석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처음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1절). 포도송이도 무화과 열매도 없다는 미가서의 본문은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유다의 상태를 지적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파산 상태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의 삶은 어떻습니까?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주님의 제자로 서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 3월20일(화) / 제30일 / 막 12:1-12 /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어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경작하도록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세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소출을 몽땅 차지할 속셈으로,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주인이 다른 종을 보내자, 역시 농부들은 종에게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내자, 이번에는 그만 종을 죽였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이 자신의 아들만큼은 존대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 상속자인 아들을 죽였습니다. 천인공노할 농부들의 죄악으로 인해 주인은 농부들을 모두 진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이 비유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님을,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들을, 농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때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버린 돌로 암시한 것은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세상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예수님을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게 높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했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포도원을 차지하려 했던 농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탐심과 이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욕심이 눈이 멀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생명의 길을 떠나 죽음의 길로 달려가게 됩니다.
▣ 3월21일(수) / 제31일 / 막 12:13-17 /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나에게 있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있나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매우 교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양자택임의 답을 요구하는 질문인데, 그 답이 무엇이든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민족반역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제국의 통치를 위협하는 자라고 고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저의를 아시고는 그들에게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이 쳐 놓은 덫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어찌 인간의 지혜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시는 지혜자이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일을 부정하지 말고, 세상에서 각자의 몫을 당당하고 바르게 감당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분별하며, 하나님께 드린다는 명분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주님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 3월22일(목) / 제32일 / 막 12:28-34 /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어떤 삶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데 합당한 삶일까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시자, 서기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예수님은“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서기관의 말을 인정하신 것을 보면 예배하는 것 못지않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도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진행되었습니다. 1941년 추운 겨울 밤, 앙드레 트로크메 목사님의 집에 유대인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크로크메 속사님은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여인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산골 마을 르 챔본에서는 주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스위스와 스페인 등으로 탈출시켜 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져 무려 5천 명의 유대인들이 무사히 프랑스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트로크메 목사님과 마을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수년 동안 이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은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삽니다. 이웃을 위한 베려와 사랑의 실천은 은혜 받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 3월23일(금) / 제33일 / 막 12:38-40 / 가식적인 삶을 버리라
☞“위선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어떤가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직무 때문에 얻은 지위와 권위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고 싶어 할 때가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는 척할 뿐, 실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때로 신앙을 이용해서 우리의 유익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는 그들을 보호해 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경제적 이익을 위한 대상으로, 우리의 육욕을 위한 대상으로 이용할 때도 있습니다. 거룩한 일을 감당함으로 얻게 된 신성한 권위를 이용하여 물질적 유익을 얻으려 하고, 성적인 흑심을 채우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운 것이기에 사람만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속인 것입니다. 악에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안에서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3월24일(토) / 제34일 / 막 12:41-44 / 삶이 담긴 헌신으로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큰 소리를 내며 사람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큰 금액을 헌금했지만,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했습니다. 당시 두 렙돈은 노동자 하루 임금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액수로 보면 부자들의 헌금이 당연히 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풍족한 중에 일부를 헌금한 것보다 작지만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한 과부가 더 큰 헌금을 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면, 헌금은 신앙의 바로미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온전히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다면, 헌금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고 기쁨과 감사가 됩니다. 과부는 생존의 위협을 무릅쓰고 가진 것을 모두 드림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드려진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이웃들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는 나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헌금은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 전능자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배하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나의 믿음의 고백을 담아 정성스레 헌금을 준비하는 오늘을 보내야겠습니다.
▣ 3월26일(월) / 제35일 / 막 13:9-13 / 끝까지 남아서 인정받는 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받은 고난이 있나요?”
고난주간의 둘째 날인 월요일은‘권위의 날’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열매 없이 껍질만 남아 있는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권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워졌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 곧 기쁜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 어리석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오랜 시간 훈련에 매진합니다. 사람들은 메달의 영광만을 보지만, 사실 선수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인내하며 고통스러운 훈련을 견뎌 냅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피땀을 흘리는 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광의 자리만을 원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역경과 눈물을 참고 마지막 날의 영광을 소망하는 믿음의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 3월27일(화) / 제36일 / 막 14:17-26 / 마지막 길목에서
☞“논쟁과 시비 속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나요?”
고난주간 셋째 날은‘변론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날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논쟁을 하셨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의 공개전도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고,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변론하시면서 매우 괴로운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플러머는 이날을‘질문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것을 보고 시기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문제, 경고의 3가지 비유(두 아들의 비유, 악한 농부의 비유, 혼인의 비유), 납세 문제, 부활 문제, 계명 문제, 메시야 문제,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한 책망, 과부의 두 렙돈의 교훈 등 많은 논쟁과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틀 후에 팔릴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괴롭히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음모를 꾸미면서 틈을 찾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던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팔 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논쟁으로 하루를 보내신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주님의 마음을 묵상해 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겠습니다.
▣ 3월28일(수) / 제37일 / 막 14:32-42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이라면 내가 겪고 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요?”
고난주간의 넷째 날은‘침묵의 날’이라고 합니다. 논쟁과 시비로 하루를 보내셨던 예수님은 다음 날 베다니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눈앞에 두고 깊은 명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날을‘침묵의 날’혹은‘은퇴의 날’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앞둔 중요한 시기에 예수님은 침묵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시면서 영적으로 무장하셨는데, 가룟 유다와 악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은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았고,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은 그를 앞세워 예수님을 체포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무기력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킬 수 없었고, 예수님이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길을 바라보며 제자들에게“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좁고 힘든 길인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좁고 지난한 길, 생명의 길을 가시는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맞추셨습니다. 온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는 하루를 보내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겠습니다.
▣ 3월29일(목) / 제38일 / 막 14:66-72 /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언제 주님의 편에 서나요?”
고난주간의 목요일은‘세족 목요일’또는‘고민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날 예수님은 미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고별설교를 하시고,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으며, 대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서 고민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고민하셨던 것입니다.
멜란히톤은“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는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셨고, 공생애를 마치실 때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좋으셨고, 섬기셨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인했고, 두 번째는 저주하며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다른 제자들의 모습과 같고, 또한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주님을 외면하고, 주님의 뜻을 외면하던 길에서 돌아서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3월30일(금) / 제39일 / 막 15:33-41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오늘 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나요?”
고난주간의 금요일은‘성금요일’또는‘수난의 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고난을 받으시고, 빌라도와 헤롯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수난의 날입니다. 그날 새벽 4시경 무장한 군인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은 새벽 4-5시 사이에 가야바와 안아스의 집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7-8시 사이에 빌라도와 헤롯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 판결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후에 어둠이 낮 12시부터 3시까지 온 땅을 덮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고, 해질 무렵 오후 6시에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불법이었고, 그들에게는 사형판결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증인을 세워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은“우리 모두 즉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고 모두가 평안한 것이 좋지 아니한가?”라고 했습니다. 악에는 논리가 있고 악한 무리들은 한 통속이 되어 악을 이어 갑니다. 예수님은 불법과 거짓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기를 방어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은 모욕과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 길은 성소의 휘장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 하나가 되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길이었습니다.
▣ 3월31일(토) / 제40일 / 막 15:42-47 / 잠시 무덤에 계시다
☞“나는 당시 상황에서 어느 자리에 있었을까요?”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은‘비애의 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이 깊은 슬픔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불안했는지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을 사흘 동안 굳게 지켜 달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세우고 총독의 이름으로 무덤을 봉인하고 지키게 했습니다. 악을 도모한 자는 권력자와 결탁하여 자기들의 악을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불의의 편에 서서 그들의 심부름을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 항거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한 자가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데 요셉처럼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있었고, 향품을 준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과 기적을 보고 따랐지만, 끝까지 주님 편에 서서 자리를 지킨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 같은 예수님의 무덤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우리는 어디를 행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봉인된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믿음이 있습니까? 슬픔을 끝내고 기쁨과 영광의 날을 행해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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