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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깊은 묵상
임현희목사 2015.2.17 조회 1800

사순절 제1/ 218() / 시 32:1-11 / 흔적이 남겨질 자리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음력에 따르면 2015년 설 연휴의 첫날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이 날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며 지내는 사순절의 첫날입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의 참회를 의미하는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기도 하면서 사순절을 맞이하는 날이 바로 오늘,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 앞에 우리 자신의 교만함과 허물을 고백하고, 삶을 절제하며 경건에 힘쓰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세상을 취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 흔적을 가리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유일한 은신처이시며 보호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고 고집 부렸습니다. 입을 열어 그 죄를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경건의 기간을 통해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며 죄를 가려 주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갈 길을 가르쳐 보이시며 우리를 주목하여 훈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의 죄로 가려졌던 그리스도의 흔적을 삶 속에 다시 회복합시다.

 

사순절 제2/ 219(목) / 렘2:9-19/ 굳어진 삶의 습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온전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거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스스로 살길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죄를 반복하였습니다. 고통 중에서 구원하여 출애굽시켜 주신 하나님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무익한 것과 바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저지른 두 가지 악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물을 거두지도 못할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판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떠나 나일 강물을 마시려 애굽으로 가고, 유브라데 강물을 마시려 앗수르로 감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들과 싸우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굳어진 오랜 삶의 습관을 고치시며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오랫동안 굳어져 버린 삶의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섬기겠다 하면서도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과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저울질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껏 내게 굳어진 삶의 습관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사랑 앞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의 습관을 세워 봅시다. 애굽과 앗수르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시다.

 

 

사순절 제3/ 220(금) / 마3:1-12/ 회개에 합당한 열매

히브리 격언에 "막히고 뒤도 막히고 옆도 막혔거든 하늘을 쳐다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여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위기가 우리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연 인간이 도움을 구하고자 하늘을 쳐다볼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의와 정결함과 진실함, 그중 어느 것도 우리에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 모세의 율법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선조들의 전통을 잘 지켜 왔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에 지나치게 집착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한편, 자신들의 죄는 합리화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힌 자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으며 무엇보다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구원은 혈통이나 지식이나 선행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외식적으로 율법을 행하거나 속으로 자신을 합리화시켜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자아도취적 사고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내 삶에 맺어야 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순절 제4/ 221(토) / 막12:1-12/ 주인을 거역한 종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때가 이르매 포도원 주인이 종을 보내 소출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돌려보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종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습니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고, 그때 농부들은 급기야 그 종을 죽이고 말았으며, 그 외 종들에게도 그렇게 대했습니다. 이제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한 사람,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 아들을 죽이면 모든 유산이 자신들의 것이 될 거라 생각하고 그를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포도원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던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함으로 얻게 되는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혹 포도원 농부들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시다.  하나님께 거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또한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역하는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중보적 회개의 기도를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5/ 223(월) / 마1:18-25/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

어느 날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을 가진 '임마누엘'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이천 년 전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삶을 공유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 태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인간의 삶의 방식을 동일하게 경험하시고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키와 지혜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었듯이 예수님은 피곤함,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하셨고, 슬피 우시기도, 또 기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간섭하시는 사랑의 방법이며,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계획입니다. 성육신하심으로 인간의 세상에 남겨진 예수님의 흔적에 눈을 돌려 봅시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 어딘가에서 뿐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 그분께서 나의 삶에 지금도 흔적을 남기고 계심을 믿으며 오늘도 하나님의 계획에 마음을 두고 살아갑시다.

 

사순절 제6/ 224(화) / 요1:1-17/ 말씀이 찾아오심

한 교회의 유치부 졸업식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졸업식을 지켜보던 한 교회 어른이 "이야! 성경을 선물로 받아서 참 좋겠구나. 어디, 그 성경 좀 구경시켜 줄래?"하고 말하자 아이는 그 어른을 빤히 쳐다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성경을 함부로 열면 안 돼요! 성경을 열면 하나님이 나와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속의 글자 안에만 머물지 않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태초부터 존재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참 생명과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흔적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분명히 계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자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온몸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숨결을 회복하고, 파괴된 인격의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삐뚤어진 생각을 고치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의 흔적을 찾아봅시다.  

 

사순절 제7/ 225(수) / 요일4:7-21/ 사랑으로 오심

어느 사진집에 한 젊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너를 갖기 전에도 너를 원했단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너를 사랑했어. 네가 태어나기 한 시간 전에도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단다. 이건 분명 생명의 기적이야"(모린 호킨스). 자녀를 향한 사랑을 참 잘 담아낸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와 닮은 더 감격스러운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은 이 사랑의 혜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사랑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듯이 사랑은 사랑을 낳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일은 오직 사랑으로 사랑을 낳는 일입니다. 오늘 사랑의 주님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소외된 자, 차별받는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등 내 가까운 가족과 이웃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사랑으로 오신 주님을 전합시다.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의 힘으로!

 

 

사순절 제8/ 226(목) / 히4:14-15:10/ 대제사장으로 오심

현 시대 신앙인들에게 대제사장의 직무는 참 생소합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대제사장은 짐슴을 잡는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제사장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사에서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속죄 제사를 위한 대제사장이면서 또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흠 없이 완벽한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다 허물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언제든 바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다양한 좌절과 실패의 상황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소망을 잊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확실히 기억합시다.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 능력과 사랑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사순절 제9/ 227(금) / 빌2:1-11/ 겸손의 왕으로 오심

'왕'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화려한 왕관과 옷, 왕궁 등일 것입니다. 나라의 최고 권위자로서 권력과 함께 주어지는 특권, 일반인은 누리지 못하는 먹을 것, 입을 것, 거주하는 곳을 소유하게 됩니다. 또 왕의 명령이 곧 법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왕의 신분은 다른 이들과 구별된 최고의 고유 권한과 위치를 가집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먼저 선포합니다.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사람들과 동일한 감정과 삶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게 온  세상의 왕으로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바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자신을 낮추시며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왕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겸손의 극치를 보여 주심으로 온 세상의 유일한 왕이 되셨습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흔적을 떠올려 봅니다. 자신의 권한과 위치를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직 시선을 아래로 향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며, 억눌린 자들을 풀어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를 소개하시며 그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나의 시선도 아래를 향해 두기로 다짐해 봅니다.

 

 

사순절 제10/ 228(토) / 롬10:1-13/ 율법의 마침으로 오심

요즘 어디든 관광지를 가면 '셀카봉'을 들고 스스로 자기 모습을 찍으며 즐기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가 촬영 사진의 줄임말인 '셀피'(selfie)를 즐기는 이들 말입니다. 또 다른 신지어 중에는 '자뻑'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상태라 여기는 모습'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표현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여겨짐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점점 지나치게 관대해지고 있는 성향이 드러난 것이라고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쓴다고 했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만 힘쓰며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믿고 그 능력을 힘입은 자들은 더 이상 율법에 의해 정죄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믿기만 하면 의롭다 여김과 구원을 받게 됩니다. 곧, 나의 자랑과 의를 이루기 위한 순종과 열심으로 살 것이 아니라 율법의 마침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주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며 예수님께 보답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1/ 32(월) / 삼상16:1-13/ 부르심의 기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다윗을 부르시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관점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보내 그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물색하게 하시는데 그때 제시된 선택의 기준은 용모나 신장 등 외모를 보지 말고 "중심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이 그 중심에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실 때, 당시 겉모습으로 사람들의 판단과 시선을 받던 세리들과 죄인들도 오직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주린 자들을 먹이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 특별한 관심을 받은 자들, 다윗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중심이 달랐습니다. 중심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만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곧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의 중심과 믿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부르심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시선으로 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부르심의 흔적에 합당한 중심을 가진 시선과 믿음을 지킵시다.

 

 

사순절 제12/ 33(화) / 마9:9-13/ 죄인을 부르심

시인 이성복은 "그날"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끝맺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미 모두가 병들어 있어 자신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것도 알지 못하기에 결국 아무도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세상 죄에 함몰되어 죄 가운데 죽어 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이렇게 탄식하며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입에 찾아가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음을 책망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무지함과 허물을 부끄러워하며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에 응하는 모든 자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자 삼아 세상에 보내시며 또 다른 죄인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병들었지만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무감각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죄인을 불러 연약함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사순절 제13/ 34(수) / 눅19:1-10/ 찾아내어 부르심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라는 저서에서 "사람의 영혼은 위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아래에서 올라온 모든 것, 질흙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가장 큰 죄는 자기가 왕자(공주)라는 사실, 자기에게 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성찰은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정체성을 상실한 채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신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가득 메워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예수님은 그중에서도 혼자서 끙끙대며 나무 위에 올랐을 삭개오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며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어느 곳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어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숨어 지내는 사람들, 하나님의 부르심에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내어 부르셨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어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4/ 35(목) / 딤후2:1-13/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한 편지에서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의 섬김을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 세 가지 직종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같이 '땀 흘리는 수고가 요청되는 일'이며, 그 충성과 성실의 결과로 각각의 보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좋은 군인은 훈장을, 규칙을 지킨 운동선수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게 되고, 수고하는 농부는 곡식을 먼저 받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일꾼은 이들처럼 '자기 비움'과 '절대 순종' 그리고 '준법'과 '수고'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그중에 특별히 군인의 복무태도를 빗대어 충성된 일꾼의 자세를 독려합니다. 무엇보다도 군인은 '자기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비움과 절대 순종이 충성된 일꾼의 제1의 조건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병사에게는 남다른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으로 인해 예수님의 좋은 병사로서 특별한 상급을 받게 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상급을 주시려고, 나를 주님의 좋은 병사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여짐과 동시에, 부활의 주님을 늘 의지함으로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연약한 나를 부르신 주님께 감사하며 훈련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가 됩시다.

 

사순절 제15/ 36일(금) / 벧전4:1-11/ 청지기로 부르심

'청지기'란 종과 주인의 중간 개념으로 '주인의 것을 잠시 위임받아 관리하는 자'를 가리킵니다(마 24:45). 주인이 위임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주인이 가지고 있는 책임감과 소유물에 대한 주인의식은 똑같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인에게 명령을 하달받아 관리하는 명백한 종으로서의 위치를 겸손히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방식은 청지기와 같은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것에 대하여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분명한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종으로서 개인의 뜻대로가 아닌 오직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해야 한다는 삶의 경계선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들은 무엇입니까? 선한 청지기가 되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겸허히 살아가는 지혜를 구합시다. 나는 과연 선한 청지기인지. 내게 주신 것을 주님의 마음을 돌보며, 감당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그리고 각각의 은사를 따라 모두에게 성실하신 주님의 은혜로 능력과 지혜 주심을 사모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봉사함으로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신실한 삶을 살아갑시다.

 

 

사순절 제16/ 37일(토) / 엡4:1-16/ 각각의 은사대로 부르심

교회는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각 사람에게 내려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받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지체들로서 생김새도, 살아가는 방식도, 문화도 다를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맡은 일도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학교 교사와 어떤이는 식당 봉사 등으로 각각의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며 주님께 자라 가는 주님의 부르심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13절)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깨닫고,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각 마디가 연결되고 한 몸을 이루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나와 지체들에게 주신 각각의 은사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은사를 주신 주님의 사랑과 뜻을 묵상해 봅시다. 그 은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하나 됨을 우해 값없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에 이전보다 더욱 특별한 감사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 주신 은사를 더욱 기쁘게 사용하여 교회의 하나 되게 하심을 이루는 삶을 삽시다. 또한 다른 지체에게 주신 은사를 더욱 귀히 여기며 존중합시다.

 

사순절 제17/ 39일(월) / 시107:10-22/ 말씀이 닿는 곳에 

한 선교 팀이 성경책 보급을 위해 1994년, 러시아 스타브로폴 지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동네 살마들은 선교 팀에게 그 지역의 오래 된 창고에 성경책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알려 주었고, 실제로 그곳에는 스탈린이 1930년대에 기독교신자들을 탄압하며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낼 때 압수했던 무품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동네 인부들을 모아 물품을 정리하여 트럭에 싣는데, 일하던 청년 한 명이 갑자기 성경 한 권을 움켜쥐고는 한쪽 구석으로 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청년이 움켜쥔 것은 바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성경책이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청년은 성경에 새겨진 할머니의 사인과 세월의 흔적을 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이런 우연도 일어나지 않음을 고백했습니다. 할머니가 보았던 성경이 수십 년 후 손자에게 찾아옴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과 흑암의 길을 가는 것을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끊임없이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며, 사망의 길을 떠나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상한 심령을 고치사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의 흔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주의 말씀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사순절 제18/ 310일(화) / 눅4:16-21/ 예언이 현실이 되어

'이루마'라는 음악가가 있습니다. 한 방송에서 그는 자신과 형제들의 이름에 대한 사연을 소개했습니다. 그에게는 누나가 둘 있는데, 그 이름들이 '이루다' '이루지'라고 합니다. 장로님이신 아버지는 자녀들의 이름을 신앙적으로 지어 주기 원했고, 기도 끝에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루지'  '이루다' 그리고 '이루마'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꿈과 비전이 담긴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우리 삶 속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었지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오심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가 주어지며,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며,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며,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날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오늘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을 위하여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사순절 제19/ 311일(수) / 마7:15-27/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자녀들이 성장하는 일을 보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자아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이 강해져 부모의 말과 뜻이 권위를 잃기 쉽습니다. 신앙인들도 이와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네!" 하고 바로바로 행동에 옮기게 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순종의 속도가 느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둔감해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삶 속에 말씀이 부족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말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들을 기회도 정망 많습니다. 그렇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는 적습니다. 곧,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더욱 적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루런 영향을 미칠수 없고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면서 아직도 행동의 변화가 없는 내 모습이 보이십니까?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21절) 천국에 들어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합시다. 그리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을 소유해야겠습니다.

 

사순절 제20/ 312일(목) / 눅6:20-26거꾸로 인생 

'거꾸로 교실'이라는 수업방식이 새로운 공부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방식을 뒤집어서 거꾸로 공부해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치던 것을 거꾸로 하여 학생이 교사나 또 다른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때 학생이 해당 부분의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 학생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에 비교해 볼 때 거꾸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화'라고 말할 만한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주어질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화'로 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복'을 누리고 싶다면 가난한 사람, 주린 사람, 우는 사람, 예수님을 위하여 미움과 욕을 당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화'를 면하는 사람이 되려면 부요한 자리, 배부른 자리, 웃는 자리, 칭찬받는 자리를 과감히 떠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거꾸로 인생'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스스로 그런 인생을 사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함께 도전해 봅시다.

 

 

사순절 제21/ 313일(금) / 눅12:1-12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취업난 속에서 '스펙 쌓기 열풍'이 한창인 가운데 많은 취업 준비생들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자기소개방법을 고안해 내야만 합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은 부각시키고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여 장점으로 만들수 있도록 글을 작성하는 것은 기본이며, 면접관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개성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면접 시 드러날 정직함과 당당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문은 믿는 자들이 삶 속에서 맞닥뜨릴 여러 상황들과 대처할 삶의 태도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외식을 주의하여야 하고,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각자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문제 삼아 넘어뜨리려는 사람들 앞에 선 위기의 순간에 무엇으로 대답할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은 어려움이 닥쳐오지도 않았는데 미리 염려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서, 주위의 평가가 염려되어서, 일신의 유익과 체면 때문에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고, 사람들과 세상 앞에 주눅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늘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라면, 성령님께 순종하는 자라면, 마땅히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지혜로 세상 속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 제22/ 314일(토) / 딤전6:3-16하나님의 사람아

미국 뉴욕의 어느 장애인 복지관에는 익명의 누군가가 쓴 글이 하나 적혀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강하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겸손하게 사는 법을 배우도록 말입니다.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반 사람이 보기에는 부족함과 불평이 가득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아름답고 특별한 고백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른 이 영광스러운 호칭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거짓 선생들과 대조시키며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이어 디모데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자, 온전케 된 자, 즉 성숙한 사람을 말합니다(딤후 3:17). 따라서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족할 줄 알며, 돈을 사랑하는 일을 포함한 모든 악한 것을 멀리하고, 적극적으로는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그리고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에 자족합니다. 또한 날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뿐만 아니라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거나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에 행복한 이유를 날마다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제23/ 316일(월) / 학2:1-9권능의 회복으로 

일상행활 속에서 사용하는 '소모품'들이 참 많습니다. 몇 번 혹은 일정 기간 사용하면 닳아 없어지거나 못 쓰게 되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물질의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요즘 시대에는 소모품이 아닌 물건도 점점 소모품화되어 가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고장난 물건을 본 모습으로 고치는 데 발생되는 에너지와 시간을 계산하여 그냥 새것을 사서 사용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대부분 판단합니다. 그런데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 모습으로 회복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습니다. 죄로 망가진 모습이나 관계를 외면하고, 불편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르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멈추게 되었습니다. 낙심하고 의욕을 잃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흥왕한 세력의 균형을 온통 뒤집어 새롭게 회복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새롭게 회복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망가지고 깨어진 것들을 회복하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일하십니다. 무너진 나의 마음을 세워 주시고 온전케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일어섭시다.

 

사순절 제24/ 317일(화) / 시85:1-13죄를 덮으신 긍휼 

가족도 없이 홀로 살던 가난한 한 노인이 20불을 훔쳤다는 죄명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는 노인에게 마지막 발언기회를 주었습니다. 노인은 "저에게 한 번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판결을 내려야 할 판사는 노인이 훔친 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자신의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방청석을 향해 누구라도 이 노인을 위해 나머지 10불을 기부할 수 있겠느냐고 외쳤습니다.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판사의 명판결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노인을 구제했습니다. 누구도 노인을 향하여 더 이상 죄인이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대원칙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불쌍히 여겨 죄의 값을 대신 치르는 긍휼을 베푼다면 죄가 사해지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본문의 저자는 여호와의 은혜가 땅에 임하여 죄악을 사하시고 죄를 덮으신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절대자의 복이 내림으로 부유하게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등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인애와 진리가 내림으로 의와 화평이 구현되고 회복된 것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죄의 유혹과 씨름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깨어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의 회복의 흔적을 자랑합시다. 

 

 

사순절 제25/ 318일(수) / 사40:1-8내 백성을 위로하라 

한 병원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준희'라는 남자아이가 매우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2살 때 자동차 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미국인 청년 '조엘'이 준희의 병실에 찾아왔습니다. 낯선 외국인을 복 경계하는 준희 앞에서 조엘은 어린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자장가를 불러 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되라는 것은 무엇이나 될 수 있어요. 높은 산도 오를 수 있고, 넓은 바다도 건널 수 있어요. 나는 크고도 대단한 약속이에요."  노래를 부르는 조엘의 눈에는 진실한 위로의 눈물이 맺혔습니다. 준희는 경계를 풀고 조엘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셔서 바벨론에 사로잡혀 와 있는 자들을 향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이사야도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중 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말씀을 받고 나서 위로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먼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처럼 세상을 일으키는 위로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한마디보다 더 큰 섬김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탁하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순절 제26/ 319일(목) / 눅15:11-24친밀한 관계의 회복

맥도날드 부부가 쓴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라는 책에서는 갈등을 빚었던 부부가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부부뿐 아니라 친구, 가족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모든 관계는 인생의 목적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해 헌신할 때 형성되는 이해와 친밀함으로 계속해서 가꾸어 가야 합니다.

  본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와 사랑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더 소중하였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집을 떠나 호의호식하였지만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한 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는 신세로 전락하고 나니 돌아갈 곳이라곤 아버지 집 뿐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가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라도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매일같이 기다렸고, 그가 돌아오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종으로라도 받아 주실지를 고민하며 괴로워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죽었다 살아 돌아온 아들이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아들과 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회복이 안 될 거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서 깨어진 예수님과의 관계와 사랑을 회복합시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처럼 용납하는 사랑으로 다가갑시다.

 

 

사순절 제27/ 320일(금) / 요11:17-44생명의 주인

나사로의 무덤에 있은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심히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마르다는 이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붙잡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이런 슬픔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비통해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니리라." 마르다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마지막 날 부활의 때라야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마르다는 이제서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생명의 주권이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고백을 들으시고 나서야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십니다. 그리고 무덤 속의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셨을 때, 그는 정말로 베와 수건을 두른 그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온전한 회복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주님께서 물으실 때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도록 나의 입술에도 마르다와 같은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하겠습니다. 생명의 회복은 시인하는 것과 고백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제28/ 321일(토) / 골1:15-20회복을 갈망하는 곳에

일제에 의해 변헝된 경복궁의 옛 모습을 되찾으려는 경복궁 복원 사업이 1991년부터 시작되어 2025년 완료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웠던 궁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학자들의 고증과 수집된 옛 그림 등의 자료들을 토대로 체계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깨어지기 전 원래의 모습에 대한 갈망은 경복궁의 화려한 재현을 더욱 기대하게 만듭니다.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다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지한 인간은 죄에 빠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피조세계를 파괴하였습니다. 회복하고 싶어도 원래의 모습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죄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창조의 주재께서 친히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사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 모습대로, 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하는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의 능력이 오늘,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갈망합니다. 참 자유롸 평안이 필요한 나라들, 가난과 굶주림에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곳들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의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사순절 제29/ 323일(월) / 막10:35-45종이 되어야 하리라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는 한국전쟁 이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한 가장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독일에 가서 광부로, 베트남 전쟁터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가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생도 다 감당했던 그였습니다. 그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 관객들은 자녀에게 고생을 물려주지 않고 혼자서 모두 감당한 것을 돌아보며 감회에 찬 아버지의 희생에 가슴 뭉클해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화를 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높아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손수 섬기셨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까지 다 내어 주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피하려고만 하는 이 세상 속에서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이기에 다행히다"라는 겸손과 희생으로 살아갑시다. 섬김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남을 섬기는 종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합시다.

 

 

사순절 제30/ 324일(화) / 롬3:19-31/ 값없이 주어진 섬김

1989년 인천의 길병원이라는 곳에서 딸 네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였던 아버지는 아내의 수술비를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나 인큐베이터를 사용하며 축적된 그 비싼 병원비를 낼 돈이 없었습니다. 그 형편을 알게 된 병원 이사장은 병원비를 받지 않고 퇴원시켜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잘 커서 대학에 가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약속대로 입학금과 장학금을 보내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지원하였습니다. 후에 네 쌍둥이는 모두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했고, 바로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값없이 주어진 섬김으로 생명이 살아나고,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지만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섬김을 값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요?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예수님의 고귀한 섬김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가끔 다른 이를 섬길 때 넌지시 어떠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입으로는 값없이 주겠다 말하는 한편 내 것이 사라진다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값없이 주어진 섬김의 은혜가 나의 생명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조건 없는 섬김도 또 다른 생명을 낳을 것이 분명함을 기억합시다.

 

사순절 제31/ 325일(수) / 마18:1-14/ 자기를 낮추는 연습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교회의 입구에는 작은 문이 있습니다. 1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는 높이의 문이기에 어른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을 '겸손의 문'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지위나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 논쟁하며 서로 다투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함께 생활한 제자들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됨을 말씀하십니다.

  어른인데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키가 자라는 만큼 자존심도 자라납니다. 힘이 세지고 몸이 단단해지는 만큼 목이 뻣뻣해지고, 타인 앞에 허리를 숙이는 것이 어색해져 갑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낮추는 연습을 반복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는 섬김의 눈과 태도를 위해 부단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바로 그러한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하루 종일,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나의 안에 자비와 겸손만이 지배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

 

사순절 제32/ 326일(목) 요9:1-12/ 진흙을 만진 겸손한 손

예수님은 길을 가사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맹인이 된 연유에 관심을 보이며, 마치 죄를 지은 결과로 주어지는 징계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세상을 보지 못한 이의 답답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기에 고통당하는 연약한 인간들 곁에서 오직 섬김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 주며, 따뜻하고 밝은 빛을 비추시어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도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친히 땅에 침을 뱉으시고, 손으로 흙을 만져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겸손한 손으로 진흙을 만지시고는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며 괴로운 과거를 보냈던 그의 눈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진흙을 만지신 겸손한 손의 능력이 이제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 다가갑시다. 진흙이라도 기꺼이 만질 수 있는 겸손의 손으로, 때로는 가까이하기 꺼려질 만큼 비참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안타까움과 사랑으로 섬기며 나아가면, 그들에게 참 기쁨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 제33/ 327일(금) 요13:1-20/ 섬김의 기억

사무엘 브랭글 목사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청년 시절, 구세군에 지원하고자 영국 구세군의 지도자 윌리엄 부스를 만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영국에 도착한 브랭글에게 부스가 시킨 일은 다른 훈련생들의 구두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브랭글은 화가 났습니다. "내가 군화나 닦으려고 대서양까지 건너왔단 밀인가?"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주님은 주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섬김의 흔적을 떠올리며 나에게도 그런 흔적이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으 발을 씻겨 드려야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그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기꺼이 제자들을 위하여 섬김의 기억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예수님의 섬김이 더욱 오래 기억되도록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섬김의 흔적 남기기를 즐거이 여기는 매일을 채워 갑시다.

 

 

사순절 제34/ 328일(토) 막14:3-9/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베풀고 투자합니다.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그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먼 길을 오고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또 상대방을 생각하면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에 가진 것을 탈탈 털어 값비싼 선물을 전하는 일을 오히려 행복이라 여깁니다. 지금껏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준비했던 선물 중 가장 비싼 것의 가격은 얼마였습니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싼 향유를 허비하였다고 화를 내며 여인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더욱 소중했던 여인은 향유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예수님께 무엇인가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존경과 사랑, 감사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며 사랑으로 섬기셨는데 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려왔던가요?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기에 인색하고, 예수님을 위한 물질을 드리기에 아까워하던 모습이 오히려 익숙하지는 않습니까? 이제라도 남은 삶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두 드리겠노라 결단합시다. 바로 오늘부터 예수님을 위하여 드릴 것이 무엇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이 끊이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사순절 제35/ 330일(월) 막14:12-31/ 유월절의 재구성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온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유월절에는 이날을 기억하며 흠 없고 일 년 된 어린 양이나 염소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이날과 같이 밤에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 양 잡는 날이 다가옴에 따라 명절의 음식을 먹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 유월절 양의 고기, 무교병과 쓴 나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 위의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그리고 잔을 가지사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려고 친히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묵상합시다. 유월절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 바로 나를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보혈을 떠올리며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경건과 절제의 삶으로 하루 하루를 채워 갑시다.

 

 사순절 제36/ 331일(화) 막14:32-52/ 오직 순종으로 마신 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죄악 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 하지만, 다가올 치욕과 고난에 예수님께서도 심히 큰 번민에 빠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예수님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게 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 잔을 피하길 원하실지라도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나아갈 것을 원하신다면 겸허히 순종하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앞에 두고 심히 괴로우셨지만,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정하신 뜻 앞에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너무나 버거워 이 잔이 내게서 옮겨 가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눈으로 고난의 잔을 바라보면 불편함에 피하고 싶은 마음이 속구쳐 올라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고난의 잔을 바라보면 괴로움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처럼 오직 순종으로 내 앞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가득히 채워 주시며 감당할 능력 주시기를 구합시다. 

 

사순절 제37/ 41일(수)/ 막14:53-72/ 시인하는 자와 부인하는 자 

가수 울랄라세션의 리더였던 고 임윤택 씨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보여 준 열정과 신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그러했지만, 한 시상식에 선 그는 당당하게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얽매이지 않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물음으로 심판의 자리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생각을 아심에도 "내가 그니라"라고 선포하시면서, 공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 등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를 빌미로 신성모독 죄를 씌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간, 아래 뜰에 있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에게,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부끄러움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처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하는 자에게는 곧 고난이 찾아올 수 있고, 부인하는 자는 잠깐 그 고난을 비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당당히 시인하는 자리에 서서 하나님 앞에 부/그럽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38/ 42일(목)/ 막15:1-20/ 조롱의 현장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십니다. 죄인의 신분으로 결박을 당하시고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십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이내 돌아오는 것은 저주와 비난뿐입니다. 같이 자리했던 군중들은 민란을 꾸미고 살인을 한 죄수 바라보보다 예수님을 더 죄인 취급합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희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묵묵히 가던 길을 가십니다. 온몸과 마음에 깊숙이 품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혹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과 조롱 때문에 예수님 사랑하기를 저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조롱당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면 여전히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의 비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사람들이 뱉은 더러운 침을 맞으시고, 희롱을 당하시고, 채찍질과 매질을 당하시며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향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살겠노라면서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간혹 비난과 조롱을 받을 때면 쉽게 흔들립니다. 그때마다 내 대신 조롱받으신 예수님, 그리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일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사순절 제39/ 43일(금)/ 막15:21-4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화가들은 예수님에 대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의 아기 예수님,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그리고 앙상한 뼈만 남은 채로 거친 상처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 등이 캔버스에 그려졌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중 그뤼네 발트의 "십자가형"을 서재에 걸어 두고 평생 묵상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 중에서도 유독 비참한 죽음의 자리를 바라본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가장 고귀한 흔적이 남겨진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지시기 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며 기적을 일으키신 성경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좋아하고 간직하고 싶은 장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가슴속에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흔적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하는 자리에서 더 나아갑니다. 나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묵묵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사순절 제40/ 44일(토)/ 막15:42-47/ 예수님 곁을 지키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늘도 빛을 잃고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절망에 휩싸여 골고다 언덕을 내려갔습니다. 제자들도 각자의 자리로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선동하던 대제사장과 무리들도 다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만 같던, 이 절망의 순간에도 예수님 곁을 지켰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당돌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굳건히 믿고 있었던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에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고 돌을 굴려 막아 놓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따라갔다가 예수님을 둔 무덤을 살피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좌절의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도 당신은 예수님 곁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절망이 아닌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곁을 지키며 살기 원합니까? 어둠 속에서도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기며, 곧 무덤 속의 침묵을 깨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실 예수님 곁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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